[시론]염재호/한 고비 넘긴 개헌논의

  • 입력 1999년 7월 15일 19시 12분


내각제 개헌 논의가 다시 한 고비를 넘겼다. 김종필총리가 연말까지 개헌논의를 유보함으로써 큰 줄기는 잡힌 것으로 보인다. 자민련 일부 의원들의 반발과 한나라당의 비난은 예상되지만 김총리의 결심은 여름 정국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정략적 목적 안될 말▼

사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통치권한을 크게 위축시킬 내각제 개헌은 현시점에서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는 못한다. 현행 헌법에 의하면 개헌안은 국회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을 거쳐 국민투표에서 투표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집권여당의 미온적인 동조만으로 개헌을 성사시키기는 어렵다.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개헌논의가 정치권의 정략적 차원의 틀을 벗어나기 바란다. 왜 국민의 기본권과 통치제도의 틀을 규정하는 헌법이 정당과 정치인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논의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개헌을 추진한다면 사회 곳곳의 다양한 논의를 수렴해 통일을 대비한 21세기형 헌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은 건국 이래 대통령과 정권의 이익을 위해 8번이나 통치체제를 바꾸는 개헌작업에 꼭두각시처럼 참여했다. 김총리나 김대통령마저 차기 정권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국민을 동원해 개헌을 하는 비극은 없어야 하겠다. 게다가 국민도 더 이상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했으면 한다.

자민련 등에서는 내각제 개헌이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논리의 비약이다. 내각제는 대선 때 많은 공약 중 하나였고 김대통령의 김총리에 대한 정치적 신의 차원에서는 문제가 될지 모르지만 대선결과로 국민이 이를 모두 지지한 것처럼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각제 공약 때문에 김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도 있겠지만 내각제 공약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심화된 상태에서 내각제를 도입하는 것은 정당이나 정치인에게는 이익일지 모르나 국민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본이나 독일처럼 봉건제의 역사도 없었고,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 한국 문화에 적합한 정치체제인지도 논의해 봐야 한다.

국민의 정부에서 지분 나누기식으로 임명된 정치인 출신 장관들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도 내각제에 대한 실험으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장관의 전문성은 떨어지고 임기는 짧고 책임감은 없는 전형적인 엽관제의 폐해가 엿보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내각제든 대통령제든 헌법개정 논의는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헌법개정 논의가 시간적 제약을 받으며 추진돼서는 안된다. 격동기를 살면서 한국인들이 잃어버린 것은 미래지향적 관점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100년 200년 후의 미국을 생각하고 헌법을 만든 것을 상기해야 한다. 제2건국을 한다면서 10년도 못가 다시 개헌논의가 나올 개헌을 해서는 안된다.

▼21세기 비전 담아야▼

개헌논의가 정치인들의 정략적 차원에 머물지 않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학계 언론 및 시민단체 등에서 통치체제에 대한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민주화를 이룩하고 20세기의 낡은 유산을 청산하는 이 시점에서 또다시 정권의 이해에 들러리나 서는 개헌 참여는 안된다.

개헌논의를 통해 정치지도자들이 이제는 국민에게 미래의 비전을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다. 정치는 상징의 극대화 과정이다. 개헌논의 과정에서 정치가 한국의 미래에 대한 상징을 극대화시켜 주기를 바란다. 냉혹한 현실정치 속에서도 정치인들로부터 여우의 간교함만을 발견하기보다는 사자의 용맹성과 비전을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북한의 미사일 개발 문제나 재벌개혁 문제 등 불안 요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 시점에 김총리의 내각제 연내 추진 포기 입장은 국민을 안도시키는 큰 정치적 결단이다. 이것이 정략적 차원에서 취하는 ‘차선의 선택’이 아니라 진정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린 결단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큰 정치인에 대한 미련을 남겨둘 수 있다. 제2건국을 한다는데, 개헌논의를 통해 미국이 자랑하는 건국의 아버지들과 같은 정치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한여름밤의 꿈이 아니기를 꿈꾼다.

염재호<고려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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