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獨 「대학살 반성 기념관」 교훈

  • 입력 1999년 6월 28일 18시 58분


1년만에 다시 찾은 독일, 언제나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나라지만 그래도 뉴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새로운 1000년을 이끌어갈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끌 새로운 ‘구경거리’가 들어서게 되었다.

연방의회는 25일 베를린에 홀로코스트 ‘만말(Mahnmal)’을 세우기로 의결함으로써 무려 11년 동안이나 계속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만말’은 ‘경고기념물’로 번역하지만 단어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쉽지가 않다.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이 이럴진대 집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잘못을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왕따’를 당하기 쉽고 심하면 배신자나 외국의 스파이로 몰려 박해를 받기도 한다.

일본이 원폭 피해를 알리기 위한 행사는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자기네가 저지른 전쟁범죄는 한사코 부인하는 것은 이런 심리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었을 때 우리가 가해자가 된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이가 별로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 남쪽에 2만㎡의 넓은 터를 마련해 나치의 유태인 학살범죄를 홍보하는 ‘만말’을 세우기로 한 독일 연방의회의 결정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에게 독일 역사의 가장 참혹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내보일 각오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건축가 아이젠만의 설계에 따라 2700개의 돌기둥과 유태인 학살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정보관’이 들어설 이 역사적인 시설은 2000년에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다.

‘종합정보관’은 최초 설계에 없었지만 ‘범죄자와 협력자및 방조자의 나라에 세우는 만말’(연방의회 부의장 안티에 폴머의 표현)이니만큼 상징적인 조형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을 의회가 받아들임으로써 추가됐다.

그런데 이 소식을 머릿기사로 전하는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1면 하단에 일본 문부성이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부활하기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는 보도가 눈에 띈다. 20세기에 두 차례나 ‘처참한 내전’을 벌였던 유럽이 화폐를 통일하기에 이른 데 반해 동아시아는 여전히 군사적 긴장과 외교적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건 동아시아 각국의 지배층이 ‘민족적 가치’ ‘아시아적 특수성’ 또는 ‘사회주의 이념’과 집단주의적 자기도취에 빠지고 이성의 눈이 가려진 나머지 아직도 과거를 소화하지 못한 채 서로에 ‘위험한 이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코스트―만말’ 반대론에 대해 보수 기민련 소속 노베르트 람머트는 이렇게 일갈했다.

“만말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걸 어디에다 쓰겠는가?”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반성함으로써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언제나 ‘위험한 이웃’으로 간주돼야 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이런 이웃이 있으니 헌정 파괴와 인권 유린에 대한 반성도 없이 유신독재의 총수 박정희씨 추모사업을 벌이는 분들이다. 이런 ‘위험한 사업’에 국민의 혈세를 지원한다면 그 정부 역시 ‘위험한 정부’의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유시민〈시사평론가〉smrhyu@ms.kr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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