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화 김승연회장]『마취없이 폐 잘라내는 심정』

  • 입력 1999년 5월 30일 20시 41분


“뼈를 깎는 것이 아니라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갈비를 들어내고 폐를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강도높은 ‘백화점’식 구조조정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화그룹의 김승연(金昇淵·47)회장. 매각 합작 전략적 제휴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룹 부채비율을 950% 포인트나 낮췄지만 “구조조정을 ‘많이’했을 뿐 잘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회장은 29,30일 용인 한화콘도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자단 세미나에 참석해 젊은 총수로서 짊어져야 했던 마음고생, 구조조정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향후 생명보험업 진출배경 등을 털어놓았다. 특히 경영난에 빠져 협조융자를 받으면서 경영권 포기각서를 썼던 당시를 돌이킬 때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호칭까지 얻었는데….

“1년새 체중이 6∼8㎏나 빠졌다. 집에 못들어간 날도 많다. 밤새 임원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의사결정 시간을 줄이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은 것이 큰 보람이다. 한화는 성공사례가 아니다. 다만 구조조정을 많이 했을 뿐이다.”

―인력을 25%나 줄이면서도 큰 파업이 없었는데….

“26세에 회장에 취임해 욕도 많이 먹고 미숙한 점도 많았다. 회장 취임 후부터 생산직과 사무직간 임금격차를 줄이는 작업을 벌였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6천여명이 회사를 떠났지만 노사분규가 한차례도 없었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고용보장은 ‘판을 깨는 요구’라며 일축했지만 ‘불공정 인사는 절대 없을 것’이란 약속을 노조가 믿어줬다.일부 언론이 ‘회장 사퇴’라는 오보를 내 직원들이 ‘회장 사퇴불가’라는 연판장을 돌린 덕택에 큰 힘을 얻었다.”

―5대그룹의 구조조정을 평가해달라.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다. 5대그룹은 덩치가 커 시간이 걸릴 뿐이다. 한화 계열을 다 합쳐도 5대재벌 주력사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 외자유치에는 신중해야 한다. 한화도 덩치 큰 사업부문을 매물로 내놓았다가 고생했다. 그쪽 정부관리까지 배석한 자리에서 협상을 시작했지만 후속협상에서 계속 말을 바꾸는 바람에 결국 ‘서로 제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렬됐다. 우리측 자료를 받아 다른 전주(錢主)를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많이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주력업종(화학 레저 금융)이 적지 않다.

“계열사 하나만 맡는다면 나도 편하다. 주력업종은 유화다. 대림과의 통합으로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유화 설비경쟁력을 갖추게 됐지만 세계 1위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비교적 자신있는 사업을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는 것은 총수의 ‘책임’에 가깝다고 본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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