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모스크바에서 생각해 본 한국

  • 입력 1999년 3월 26일 18시 53분


3년 9개월만에 다시 방문한 모스크바는 훨씬 밝아 보였다. 날씨가 서울보다 따뜻해 흰 눈이 내리는데도 포근했다. 그러나 국내외 사정은 어두워 보였으며, 거기서 우리가 참고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느꼈다.

우선 대외관계를 살펴보자. 원래 옐친 정권의 외교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대서양학파’에 이끌려 왔다. 여기에 맞선 세력이 ‘유라시아학파’이다. ‘대서양학파’의 주장대로 따라가면 러시아는 결국 미국의 세계전략에 종속되고 말 것이므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도 균형있게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갈등빚는 美-러관계

그러면 오늘날은? 필자는미 국에 대한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하는 전역(戰域)미사일방어망(TMD) 구축계획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미국이 이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러시아와 미국과의 관계는 물론 국제관계 전반은 ‘새로운 위기’에 빠질 것이라는 강경한 표현마저 썼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추가 지원을 받고자 미국으로 가던 프리마코프 총리가 미국이 유고슬라비아연방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을 통한 무력공격을 개시하자 귀국한 일도 러시아의 반미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러한 일이 거듭되면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데탕트 분위기는 냉각되고 ‘새로운 냉전’이 전개될지 모른다. 그러한 경우 “21세기엔 탈냉전의 화해와 협력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것이며 그러한 국제환경에 영향받아 남북한관계도 크게 개선될 것”이라는 우리의 낙관적 전망은 재고될 수밖에 없다. 또 미국과의 공조를 강조해 온 우리 외교의 행동반경 역시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이미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크라신 외무차관은 한국이 TMD에 가입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북한과 미중이 참가하고 있는 4자회담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비판했다. 북한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켰고 북한을 3년동안 점령통치했던 러시아를 제외시킨 채 한반도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겠느냐는 항의였다.

이어 국내정세에 눈을 돌리면, 옐친 대통령의 통치력 약화 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1차적 원인은 옐친의 건강악화일 것이다. 집권 제1기 때도 그러했지만 집권 제2기에 와서는 심장수술까지 받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사실상 병상에서 통치한다는 말까지 듣게 되면서, 게다가 임기가 1년 몇 개월밖에 남지 않게 되면서 그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막내딸 타티야 디야첸코를 중심으로 한 부정부패의 확산이었다. 현지의 언론매체들은 “국민의 지탄을 받는 부정부패의 배후에는 반드시 타티야 디야첸코가 있다”고 공격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투병과 요양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는 부분들을 딸이 떠맡으면서 그녀의 권력이 크렘린을 지배하게 됐다는 공격도 뒤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그녀를 보리스 보레조프스키라는 억만장자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후 거만(巨萬)의 부(富)를 축적한 그는 값진 보석들과 돈으로 그녀를 매수해 많은 이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현지의 언론매체들은 그를 ‘현대판 라스푸틴’이라고 불렀다. 시베리아의 엉터리 승려였던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때 사술(詐術)로써 황후를 손에 넣은 뒤 황제마저 장악해 온갖 못된 짓을 다한 음란한 간신이었다.

▼정치에 詐術 없어야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기 공민왕의 총신 신돈(辛頓)을 라스푸틴에 비유하곤 했다. 그러나 신돈은 백성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개혁을 추구하다 기득권층에 암살됐다는 점에서 라스푸틴과 다르다. 오히려 현대 한국에서 ‘한국판 라스푸틴’이 세론에 오른 일이 있었다. 그것이 ‘괴(怪)목사’인 경우도 있었고, ‘정체불명의 참모’인 경우도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집권자의 ‘로열 패밀리’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국정을 문란시킨,말하자면 ‘라스푸틴 신드롬(징후)’의 경우도 있었다. 21세기 ‘제2의 건국’을 향한 ‘젊은 층의 수혈론’이 화제가 되고 있다. 좋은 방향이다. 그러나 그것에 앞서 ‘한국판 라스푸틴’이나 ‘라스푸틴 신드롬’이 ‘국민의 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하기 바란다.

김학준〈본사논설고문·인천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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