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방식/꽃이 좋아 꽃과 함께 살어리랏다

입력 1999-03-11 19:25수정 2009-09-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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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유학생활 끝에 79년 독일에서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갖고 귀국했다. 당시 한국에는 꽃꽂이 학원 몇 개만 있을 뿐 ‘플로리스트’란 직업은 미개척 분야였다. 지금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 직업을 ‘플로리스트’라고 말하면 한번 더 묻는 사람이 많다.

‘플로리스트’란 꽃을 뜻하는 라틴어 ‘플로스(flos, flois)와 전문직업인 또는 예술가를 나타내는 접미사 ‘이스트(ist)’의 합성어.

꽃의 종합예술가를 뜻한다. 가장 필요한 자질은 심미안. 훌륭한 플로리스트가 되려면 식물학 등 이론을 비롯해 예술사조 조형미술과 색채론 실내장식 등 예술분야, 식물재배 및 유통 판매 고객상담 등 경영 환경보호 개념까지 이해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꽃에 심취했다. 태어나 처음 갖고 싶었던 것도 장난감이 아니라 한 송이 옥잠화였다.

군복무 뒤 70년에 독일로 건너갔다.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된 첫사랑의 여인을 찾기 위해서 광원을 지원했다. 하지만 사랑은 못 이루고 엉뚱하게 플로리스트가 됐다.

독일 막장에서 1년반 동안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비행기요금과 수수료 등을 완납하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됐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알았던 독일인을 만났다. 국제협력센터의 한국지부장으로 소록도의 나환자병원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박애주의자 브레스켐프의 소개로 본 교외의 바움슬레(농업전문대학의 일종)에 입학했다.

독일의 대학생활은 그야말로 지옥훈련. 동양인은 단 한 사람이었다. 보통 아침일찍 시작해 밤늦도록 식물학 이론교육과 풀뽑기 가지치기 접붙이기 등 고된 실습생활을 시켰다. 현지 학생들과 달리 잠도 못자며 식물의 라틴어 학명을 외워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조경분야 국가자격증을 땄다. 그리고도 동양인 최초로 마이스터 플로리스트(꽃을 소재로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자격증)가 되기 위해 다시 5년을 보냈다. 독일 총리관저의 꽃꽂이도 맡았고 전시회도 열었지만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귀국을 결심했다.

한국에 돌아와 꽃예술원을 설립해 후진도 양성하고 많은 작업을 해왔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때 주경기장과 승마경기장의 플라워 디스플레이를 성공적으로 연출했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 지난해 독일연방공화국이 주최한 분데스가든사워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

플로리스트로서 가장 힘든 점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 일. 산속을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받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해마다 장마철만 되면 입산해 새로운 재료를 찾아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꽃에 인생을 건 남자’라고 부른다. 매너리즘을 벗어나기 위해 96년 다시 한번 독일유학을 다녀왔다. 요즘도 하루 서너시간씩 자고 꽃을 연구한다.

언젠가 세계적 꽃예술가를 길러낼 예술대학을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 모두가 힘든 국제통화기금(IMF) 시대이지만 한 송이라도 꽃을 가까이 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방식<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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