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향기]송수권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

  • 입력 1999년 3월 1일 20시 04분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뭉치들이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베 옷 검은 두건을 걸친 백제 젊은 修士들이 지나고

풋풋한 망아지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자락들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 노을’(시와시학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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