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윤기/오잘란이 증오하는 땅 터키

  • 입력 1999년 2월 18일 19시 24분


나는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사랑한다. 나는 그가 쓴 불후의 명작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와 ‘미칼레스 대장’의 한국어판 번역자이기도 하고,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와 자서전 ‘그리스인에게 고함’의 애독자이기도 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글로 그를 찬양한 적도 있다.

▼ 카잔차키스의 터키 ▼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온존하게 제 몫의 삶 누리기를 마다하고 떠돌이 앞소리꾼이 되어 영혼의 자유를 외치던 거인,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드높이고, 그 드높이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문학적 표정을 부여하는, 참으로 초인적인 작업을 시도한 거인이 있다.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카잔차키스의 문학은 존재와의 거대한 싸움터, 한 두 마디로는 싸잡아서 정의할 수 없는 광활한 대륙을 떠올리게 한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우리 나라 사정에 견주자면 크레타는 제주도쯤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는 당연히 그리스인이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청년 시절의 그는 크레타인으로 자칭하기를 좋아했다.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이 크레타 섬만이 그가 태어날 당시까지도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의 터키는 우리의 일본에 해당한다. 일제 치하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그랬듯이 터키의 압제 아래 있던 크레타는, 삶에 대한 그의 비극적 인식의 출발점이다. 3단계에 이르는 그의 투쟁과 각성은 삶에 대한 이 비극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터키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참담한 피란 생활을 경험하고 사춘기에 이르렀던 그는 인류의 보편적 자유와 자기 해방에 대한 목마름을 세 단계의 투쟁으로 요약해 낸다. 이것이 바로 그가 세우게 되는 삶의 3단계 투쟁 계획이다.

‘압제자 터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1단계 투쟁, 우리 내부의 터키라고 할 수 있는 무지 악의 공포 같은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2단계 투쟁, 그리고 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우리가 섬기는 중에 우상이 되어 버린 것들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3단계 투쟁….’

제1단계 투쟁은 크레타가 터키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 완료된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크레타와 터키는 그의 염두를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온 세상이 크레타와 터키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크레타와 터키’라고 한 것은 고뇌와 고통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자 인간을 물리적으로 압제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지 크레타와 터키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크레타와 터키’는 그가 투쟁의 양식을 바꾸는 데 따라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정신과 물질’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영혼과 육체’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되기도 한다.

▼ 거대한 文化용광로 ▼

카잔차키스에게 ‘부정적인 것’ ‘물리적 압제’ ‘속된 것’의 상징이었던 터키를 다녀왔다. 지금, 그리스 땅으로 몰려와 천막에 의지하는 삶으로 터키의 압제에 항의하고 있는 쿠르드 족에게 터키는 여전히 그런 땅일 터이다.

그러나 터키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의 상징인 것만은 아니었다. 크레타 사람 카잔차키스가 증오하던 땅, 쿠르드족 지도자 오잘란이 증오하고 있는 땅인 것만은 아니었다.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땅,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만나는 땅, 서로 모순되는 온갖 것들을 만나게 하고,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것들을 화해시키는, 문화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터키는 부정적인 것의 상징도 물리적인 압제의 상징도,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땅도 아니었다. 카잔차키스가 그토록 사랑하여 마지않던 크레타 섬도 다녀왔다.

내가 긴 여행의 종착지 크레타 섬에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순간은, 카잔차키스가 그토록 증오하던 터키와 화해하는 순간, 나의 터키와 나의 카잔차키스가 화해하는 순간, 새 화두가 하나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니코스, 터키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공부하는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마세요.’

이윤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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