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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월 17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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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는 소식은 모두들 알고 있었소. 서울로 여러 곳에 전화를 해봤지만 좀 쉬시도록 내버려 두라구 해서…. 여기서두 형님 쉴 곳을 마련해 놓고 연락 오기만 기다리구 있었습니다.
그래 다들 잘있지?
잘 있지요. 배 부르고 등 따시고…. 세상이 참 많이 변했슴다.
어쩐지 그는 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사십대 중반이면 그도 늙었고 주위의 친구들도 거의 오십줄에 접어 들었으리라. 한 세대가 흘러가버렸다. 광주, 그러나 이제는 저 울렁거림 따위는 없다. 전에는 그 도시의 이름만 떠올려도 마치 글자 주위에 불의 링을 달아놓은 것처럼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무슨 특산물로 유명해진 관광지 이름처럼 들린다. 몇 년만인가. 나는 턱짓으로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일년, 이년… 십 칠년, 십 팔년, 십 구년. 그들의 얼굴이나 기억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는 저들은 모두 앳되고 어설프고 가난한 젊은이들이었다. 죽은 애들은 더욱 영원히 젊다.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고서 나는 교도소에서 가지고 나왔던 징역 보따리를 풀어 방안에 마음대로 펼쳐놓았다. 초라한 속옷가지들과 겨울 스웨터 두어 벌, 두꺼운 털양말, 목도리, 털실 장갑, 책 몇권, 쓰다만 치약과 솔이 억센 새 칫솔들, 그리고 일반수 애들이 만들어 준 손바닥 운동기구와 금거북 상이 보였다. 손바닥 운동기구란 목공부 아이들이 틈틈이 염주와 함께 만든 것인데 향나무 막대를 타원형으로 깎아 나무 침을 촘촘하게 박아 놓은 물건이었다. 손이 시린 아침에 그것을 손아귀에 넣고 조몰락거리면 손바닥에 수지침을 맞는 것같은 효과가 있어서 동상에도 안걸리고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하였다. 나는 이 손때 묻은 물건을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해본다. 금거북 상은 관급 빨랫비누를 정교하게 깎아서 빤짝이 페인트를 칠한 것인데 감방에 재수가 좋으라고 변소 옆 선반에 모셔 두던 물건이었다. 그것들은 밖에 나오자마자 쓸쓸하게도 초라하고 남루한 물건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거 다 버리지 그러니?
누님이 어깨 너머로 들여다 보다가 말을 건넸다.
나중에… 그럴 생각입니다.
어디 다녀올 생각이냐?
네, 옛날 친구들 좀 만나 보려구요.
그래 바람이라두 쏘이구 오렴. 너 다녀오는 동안에 우린 너 살 집을 구해볼까 한다.
집이요?
왜, 너두 이제부턴 살아갈 준비두 하구, 장가두 들구 해야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신신당부를 하셨어. 네 앞으로 준비해 두신 것두 있구.
혹시 누님… 한 선생 주소 아세요?
내가 말했지? 편지 갖고 있다구. 너 괜찮겠지….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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