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부처 경영진단]“내자리는?” 官街 뒤숭숭

  • 입력 1998년 12월 31일 18시 06분


《직원 1백만명의 ‘거대 공룡’ 정부조직에 태풍이 불고 있다.

정부수립 후 처음 실시되고 있는 부처별 경영진단에 따라 자리와 권한의 존속여부가 결정되고 부처와 개인의 명운이 갈리기 때문이다. 흔히 ‘철 밥그릇’으로 불릴 만큼 직업적 안정성이 높았고 사회적 존경의 정도나 영향력의 크기에서 다른 분야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렸던 관료사회도 마침내 변화 속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

정부가 민간 컨설팅업체의 진단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공무원들의 자존심은 상해 있다. 그러나 경영진단에 따라 이들은 주요 자리 중 상당수를 곧 민간인에게 내줘야 한다. 경영진단은 또 3월로 예상되는 대대적인 제2차 정부조직 개편의 기초자료로 쓰인다. 결과에 따라서는 2∼4개 부처가 아예 간판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서울 세종로와 경기 과천 관가는 부처와 고위 공직자들의 살아남기 경쟁이 치열하다. 경영진단팀을 상대로 한 로비전도 뜨겁고 금융 산업 예산 등 핵심 영역의 업무 이관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부처간 경쟁도 뜨겁다.

정부부처 경영진단의 실태를 파헤쳐 본다.》

▽진행상황〓경영진단은 지난해 11월초 시작됐다. 대상은 17개 부처, 4개 위원회, 2개 처(處) 등 모든 중앙행정기관. 집도의(執刀醫)는 국내외의 20개 민간 경영 컨설팅 기관들. 용역비만도 41억5천만원에 달한다. 지난 연말에 1차 진단이 끝나 중간보고서가 기획예산위에 제출돼 있다.

2차 진단은 1월초 시작된다. 기획예산위 진념(陳稔)위원장은 “경영진단 결과를 토대로 3월 중에는 정부조직 개편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2월 중순부터는 경영진단팀의 작업과 병행해 정부 자체적으로도 조직개편 준비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1차 진단의 핵심은 ‘개방형 직위제’도입. 3급이상 고위직의 30%를 민간에 개방해 경쟁력을 높인다는 방침에 따라 부처마다 개방형이 될 직위들이 추천됐다. 대체로 감사관 공보관 국제협력관 등 주변직이 많이 거론됐지만 정책분야의 요직도 상당수 포함됐다. 정부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올 상반기에 3급∼차관보(1급)까지 8백여 자리 중 상당부분을 일정 자격을 갖춘 민간인과 공무원을 상대로 한 공개경쟁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한 민간연구소의 연구조정실장은 “고위직 관료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고급 직업군(群)”이라며 “이미 대학 연구소 민간기업의 간부들이 응모할 생각을 갖고 관련 정보수집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또 상당수 진단팀들은 해당 부처의 고객만족도와 내부역량 조사를 실시했다. 15개 항목에 걸친 재정금융분야의 내부역량 조사에서는 금융감독위원회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재정경제부는 좋지 않게 나타났다. 재경부는 고객만족도 중 전문성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었지만 기능에 비해 인원이 많고 조직 내부의 사기도 낮은 것으로 보고됐다.

반면 금감위는 직원의 성취동기가 강하고 공무원 특유의 매너리즘이 덜하다는 점이 장점인 반면 역할이 제대로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중한 ‘미션’이 몰려있다고 지적됐다. 또 금감위가 금융감독 업무를 맡고 있는데도 법령 제정 개정권을 재경부가 갖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도 중간보고서에 담겼다. 금감위와 금융감독원의 관계 설정의 모호함, 재경부의 국민생활국과 공정위 업무와의 중복 등도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지적됐다.

▽술렁이는 공직사회〓“내 자리도 일반미(一般米·‘민간인’을 의미)들에게 넘어가는 거야?” “우리 국(局)이 아예 없어진다는 얘기가 돌던데….”

관가는 불안과 우려로 술렁이고 있다. 경영진단 결과에 따라 부처의 명운이 갈리고 개인의 사활이 갈리기 때문이다. 이른바 ‘행정빅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재경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 등의 고위직 공무원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분위기다.

경영진단팀을 상대로 한 로비도 치열하다. 산자부는 경영진단 조정위원회 멤버와 맨투맨으로 접촉할 간부들을 지정했다. 재경부는 이미 김진표(金振杓)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준비단장(1급)을 팀장으로 정부조직개편 대응반을 태스크포스로 구성해 가동 중이다. 주요 국장 및 서기관들에게도 “진단팀 멤버와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적극적으로 로비하라”는 독촉 섞인 지시가 떨어졌다.

로비대상은 자기 부처 진단팀에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부를 맡고 있는 한 진단팀은 최근 교육부 간부들의 식사제의를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교육부가 노동부 진단팀에 손길을 뻗친 것은 노동부의 교육훈련업무를 빼앗고 싶기 때문. 이처럼 서로 연관된 업무영역을 빼앗기 위한 로비전도 치열하다.

▽문제점〓최근 경영진단팀과 면담했던 행정자치부의 모국장은 “진단팀 요원이 다짜고짜로 ‘그 자리는 외부인사로 채워도 되지 않겠느냐’고 묻더라”면서 “대부분의 진단이 기초지식도 없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면 어떻게 내 자리의 존폐여부를 그런 진단에 맡길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진단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들도 적지 않다. 우선 9개 진단팀의 기준과 방법이 서로 다르고 심한 경우 실력도 차이가 있다. 정부진단을 외국 회사에 맡길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외국계 컨설팅회사들을 주계약자 선정에서 배제하다보니 일부 진단팀의 능력 부족이 드러나고 있는 것.

경영진단을 실무 지휘하고 있는 김태겸(金泰謙)기획예산위행정개혁단장도 “진단팀마다 수준 차이가 있고 민간 컨설팅 요원들이 공공부문에 대해 경험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진단팀들이 부처업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보니 그 부처의 논리에 사로잡힐 우려도 크다. 특히 부처간에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담당 부처의 논리를 대변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경영진단은 세금만 낭비하는 하나마나한 작업으로 끝날 수도 있다.

경영진단의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사전 각본설’도 파다하다. 청와대나 기획예산위가 이미 머릿속에 정부조직개편의 틀을 다 짜놓고 공직사회의 반발을 돌파하기 위한 명분으로 경영진단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진단 조정위원장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오석홍(吳錫泓)교수는 “60이 넘은 나이에 내가 관변소리를 듣는 일을 하겠느냐”는 말로 이같은 우려를 일축했다.

기획예산위 진념위원장도 “고객 중심의 정부 운영, 합리화, 슬림화라는 기본방향은 분명히 세워놓았지만 어떤 밑그림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정부는 경영진단 결과에 상당부분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슈 추적팀〉

(팀장 이재호 정치부차장 이기홍(사회부) 박현진(경제부) 윤종구(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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