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62)

  • 입력 1998년 12월 29일 19시 30분


태평성대 ②

조국은 재작년인가 김태성 사장으로부터 독립하여 ‘조국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오랫동안의 꿈을 이루었다면 떡집 따위가 아닌 피자집 3층에 있다는 점이다. 하는 일은 자질구레했다. 칼국수집이나 조개구이집, 돼지갈비집의 신장개업 때 전단에 넣을 사진, 혹은 주로 베트남 같은 개발도상국 쪽에 손톱깎이나 모조보석을 수출하는 군소회사의 팜플렛 사진을 찍었다. 주된 수입원은 회갑, 돌, 유치원 졸업식 같은 데에 출사 나가는 것이었다.

승주는 그 동안에도 세 군데나 직장을 옮겼다. 모두 영업, 즉 외판이었는데 현주누나를 비롯한 측근 몇 사람에게 정수기나 전자요 몇 개를 팔면 때려치는 식으로 근근이 용돈을 벌었다.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건너가는 사이의 휴식기에는 주로 ‘허송세월’이라는 이름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고르는 걸 일로 삼았다. 그는 모텔까지 따라들어온 여자가 막상 옷을 안 벗겠다고 버틸 때 말고는 시간이 아깝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국과 승주는 자기들이 꽤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누군가 자신을 멋진 놈이라고 말해주면 망설임없이 ‘사람 볼 줄 안다’며 대견해 할 것이다. 대신 그들은 나를 딱하게 여겼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꾸준히 개폼을 잡고 갖은 인상 써가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노고가 많냐며 동정하는 거였다.

조국이 내 잔에 새로 소주를 채웠다.

“요새도 자서전 많이 쓰냐? 너 학교 때부터 편지 대필하고 군대 가서도 그러더니 결국 남의 인생 대필해서 먹고 사는구나?”

“형준이 쟤 고등학교 때는 소설도 썼는데, 왜, 생각 안 나냐? ‘녀석은 그날도 겨드랑이 밑에서 터져나오는 재채기를 참을 수 없었다’ ‘녀석은 염소가 힘이 센지 돼지가 더 센지 오늘만은 기필코 알아볼 작정이었다’ 뭐 그런 거.”

“쟤가 안 써서 그렇지, 쓰기만 하면 윤동주나 서정주 소설보다 나을걸?”

조국과 승주는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마누라가 요새 이혼하자고 덤벼. 아무래도 남자가 있는 것 같아.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애들까지 다 데려가겠다는데? 그래? 더 이상 좋을 순 없네? 야, 난 짤랐단 말야. 네 마누라가 알아서 수술했다면서 왜 네가 짤라? 몇 년 전에 어떤 여자가 나 때문에 중절수술을 한 적이 있어. 그때는 나도 꽤 심각했거든.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게 할 수 없잖아. 그래서 마누라 몰래 잘랐는데 자식새끼 다 데려가면 어디에서 뿌리를 찾냐? 뿌리? 네가 웬일이냐? 그런 데라면 벗어나려고 아둥바둥하지 않았냐? 너도 내 나이 돼봐라. 그러셔? 넌 별일 없냐? 나야 원래부터 가정적이니까. 사업상 자주 가는 룸살롱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나는 가정적이라고 소문났어. 절대로 한 번 옆에 앉힌 아가씨를 두 번은 안 앉히잖아. 아가씨를 돌아가면서 골고루 끼고 앉는 게 가정적인 거냐? 그럼. 늘 한 아가씨만 찾다보면 행여 정들까봐 미리 경계하는 건데 그 자제력이 대단하지 않냐?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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