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생각하며]신재국/자선냄비 채우는 보통사람들

  • 입력 1998년 12월 24일 18시 56분


독일과 프랑스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어느 해 성탄절.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고통스러운 전선의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감회를 주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새벽 보초를 서던 한 프랑스 병사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휘파람 선율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성탄절이면 고향 교회에서 트리를 만들어 세우고 성극 연습으로 들떠 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 것.

그런데 아, 이게 웬일인가. 조그만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중이던 독일군 적진의 초병이 이젠 휘파람이 아닌 목소리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따라 부르는게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은 계급의 높고 낮음, 아군 적군의 구분도 없었다. 모두가 하나되어 힘찬 합창으로 구주가 오셨음을 찬양하고 전쟁을 넘어 하나가 된 것이다.

12월 들어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랑의 종이 울려퍼지고 있다. 경제한파 때문인지 시내 중심가에도 선물 꾸러미를 든 사람들이 예년처럼 눈에 많이 띄지 않고 이맘 때면 흥청거리던 거리도 예전같지 않다. 하지만 내가 지키는 자선냄비로 다가오는 따뜻한 손길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성탄절을 실감한다.

금년 자선냄비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는 옛날 독불(獨佛)전선에서처럼 평화를 알리는 종소리이길 바란다. 특히 경제한파로 인해 각박해진 인심을 녹여주는 더욱 큰 사랑과 평화의 합창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선냄비는 단지 냄비에 모인 돈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누구나 한번쯤 이웃을 돕는 일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선냄비는 이웃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생들이 이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마음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종소리인 셈이다.

요즘 사회가 각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가정경제의 파탄으로 가족이 붕괴되고 말만 들어도 끔찍스러운 어린이 유괴에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하여 자해소동까지 벌이는 각박한 현실이다. 그러나 자선냄비를 지키면서 우리 봉사자들은 공통적으로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 감사한다. 아직도 대다수의 시민은 나보다 못한 이웃을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이는 불경기나 어떠한 경제 한파로도 막지 못한다. 그래서 자선냄비마저 경제 한파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세간의 염려와는 달리 오늘도 냄비는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무엇보다 자선냄비가 사람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것은 모금 방법의 익명성 때문일 것이다. 자선냄비에 모금된 금액은 누가 얼마를 넣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돈을 넣는 사람 역시 아무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종을 흔드는 구세군 군우들 또한 아무도 누가 얼마를 넣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늘도 자선냄비에는 노숙자의 때묻은 동전, 익명의 신사가 기부한 거액의 수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자선냄비에 모아진 사랑과 정성이 독불전선의 총성을 멈추게한 어느 병사의 휘파람 선율처럼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희망을 알리는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신재국<구세군 대한본영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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