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李총재께 여쭙습니다

  • 입력 1998년 12월 21일 19시 24분


이회창총재님,

상심과 분노가 크시리라 짐작됩니다. 그러실만도 합니다. 1년 사이에 국회의원 28명이 한나라당을 떠났습니다. 특히 총재님을 헌신적으로 도왔던 동생이 구속됐습니다. 그런데도 세풍과 총풍은 아직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깊은 통한을 느낀다.(김대중정부는) 국민을 괴롭히는 일 외에 한 일이 없다. 왜 이런 정권의 탄생을 허용했는지 고뇌와 안타까움이 크다.” 총재께서는 엊그제 당내 회의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당내에서는 ‘이회창이 안된 1백99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됐어도 ‘그 놈의 39만표차’는 없었을텐데… 하고 요즘도 말합니다. 총재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총재님, 외람되지만 지금은 울분이나 토로하실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한나라당은 바람직한 상태인가, 총재님의 정국대처에 잘못은 없었는가, 어떻게 하면 총재님과 당의 장래를 밝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곰곰 따져보셔야 합니다.

정권교체 이후 여야는 끊임없이 마찰하며 서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한나라당은 정권이 ‘이회창 죽이기’를 계속하고 의회정치를 압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권은 야당을 대하는 유연성과 포용력이 크게 부족합니다. 때로는 오만합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상대적입니다. 총재께서 2선에 계시는 동안 한나라당은 국무총리 인준을 6개월이나 거부했습니다. 총재께서 8월말에 복귀하신 뒤에도 국회를 오랫동안 외면해 여러 법안의 심의를 지연시켰습니다. 한나라당으로서는 항의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혹시 ‘통한’도 작용한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이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정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닙니다. 상대의 손해가 그대로 나의 이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총재께서 싸울 때 싸우더라도 경제회생과 개혁에 관한 법안의 조기통과를 오히려 선도(先導)하면서 정부를 향해 간간이 훈수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국민이 보는 총재님의 정치적 위상은 훨씬 커졌을지도 모릅니다.

세풍과 총풍도 그렇습니다. 총재께서는 총풍이 고문조작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계십니다. 세풍에 대해서는 사과를 계속 거부하시다가 여야 총재회담을 위한 막후 협상의 결과로, 그것도 국민을 향해서가 아니라 의원총회에서 사과 비슷한 발언을 하셨을 뿐입니다. 전면 부인과 인색한 사과가 총재님의 이미지를 좋게 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당내 최다선의원인 신상우 국회 부의장이 ‘당의 상황을 볼 때 도저히 가만 있을 수 없어서’ 총재께 고언(苦言)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나라당은 심각합니다. 많은 의원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차기 대권경쟁 구도, 중기적으로는 개헌 논의와 내후년 총선 풍향, 단기적으로는 세풍과 총풍의 결말… 이런 여러 고비가 한나라당에 기회일까요, 위기가 될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총재께 달렸습니다.

정치인들이 진로를 고민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미래전망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하면 고민하는 것입니다. 신참 어부(漁夫)는 폭풍을 제일 겁내지만 노련한 어부는 농무(濃霧)를 더 두려워 한다는 일본의 옛말도 있잖습니까.

이낙연(논설위원)naky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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