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87]YS,노동법날치기로 통치기반 흔들

  • 입력 1998년 11월 26일 19시 39분


노동법 날치기 처리는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임기말 1년을 무력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실 김대통령이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 참석 및 동남아 3개국 순방을 위해 96년 11월20일 출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권은 노동법 연내 통과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김광일(金光一)청와대비서실장의 거듭된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김실장은 11월6일 기자간담회에서 11월9일로 활동이 종료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정기국회 시한(12월18일)에 이 문제가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제도개선은 무리하게 날짜를 정해 처리할 성질이 아니다.”

김실장은 나흘 뒤인 11월13일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통과시한을 연내로 정하지는 않았다. 노동관계법이 연내에 통과되면 좋겠지만 안되면 가장 가까운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면 된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APEC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인 12월8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회의 분위기는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날 회의에 정부쪽에서는 이수성(李壽成)총리 김광일비서실장 이원종(李源宗)정무수석 박세일(朴世逸)사회복지수석이 참석했다. 신한국당에서는 이홍구(李洪九)대표 이상득(李相得)정책위원회의장 서청원(徐淸源)원내총무가 참석했다.

서전총무의 기억.

“그 당시 여야 3당 총무 사이에는 1월 임시국회에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합의처리하자는데 사실상 합의가 이뤄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위당정회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청와대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연내에 처리해야 한다고 밀어붙였습니다. 내년으로 넘겨도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대표도 별 말이 없었고, 반대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습니다.”

이날 고위당정회의의 결론은 정기국회 회기내 처리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상득의장이 서총무에게 한마디 던졌다.

“서총무, 정말 대단합디다.”

회의 분위기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말이었다. 여권 핵심부의 분위기가 급선회한 배경은 무엇일까.

당시 청와대내 민주계 소장비서관의 증언.

“김대통령은 필리핀에서 돌아온 직후 매우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11월24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클린턴대통령을 설득해 강릉무장간첩사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데 성공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사실 김대통령은 무장간첩사건에 대한 클린턴대통령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국내 여론이 들끓었고 정부가 북한의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을 대북지원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는데도 미국은 무장간첩사건의 의미 자체를 평가절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필리핀 정상회담에서 클린턴대통령으로부터 ‘선(先)사과 및 재발방지’를 북한측에 요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말이 설득이지 김대통령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클린턴을 몰아붙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대통령은 9월경부터 남한측 인사와 망명교섭을 시작한 황장엽(黃長燁)북한 노동당비서를 통해 관계기관이 입수한 미국-북한 비밀접촉 내용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김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정부에 알리지도 않고 북한과 비밀리에 직접 접촉한 사실을 거론하며 클린턴대통령에게 “이러고도 맹방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압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법 날치기에 따른 국민적 저항, 해가 바뀌자마자 터져나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한보사태, 그리고 차남 현철(賢哲)씨의 구속과 대선자금파문은 김대통령의 ‘자신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말았다.

야당은 물론 여권에서도 거국내각론과 김대통령의 ‘하야론(下野論)’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총재는 97년 2월4일 연두 기자회견을 대신한 간담회에서 “김대통령은 실패한 경제 외교 및 남북문제, 공정한 선거관리 등 세가지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신한국당을 떠나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1년 남은 임기 동안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보다 앞서 민주당 이기택(李基澤)총재도 1월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날치기 처리된 노동법 개정안의 무효를 주장하며 비상거국내각을 구성하는 길 이외에는 해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었다. 신한국당의 이만섭(李萬燮)고문은 김대통령에게 92년 대선자금의 솔직한 고백을 공개적으로 촉구하면서 “김대통령이 그(대선자금) 때문에 대통령직을 물러나야 한다면 내가 맨몸으로라도 돌팔매를 막겠다”고 고언(苦言)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이미 지근(至近)거리의 오랜 친구로부터 사실상 ‘하야 충고’를 받고 있었다.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이 구속되고 현철씨가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있던 2월 중순.

김대통령은 청와대에서 40년 지기(知己)인 김윤도(金允燾)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김변호사는 김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 허물없는 얘기를 나눠온 인사.

김변호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김대통령, 이제 문민정부의 정통성과 권위는 모두 땅에 떨어졌소. 거국내각을 구성해 통치권을 위임해야 합니다.”

김변호사가 비록 ‘하야’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김변호사는 내친 김에 “이번에는 젊은 애들 말 듣지 말고 꼭 내 말대로 합시다”라고 다짐했다. 김변호사가 말하는 ‘젊은 애들’이란 현철씨와 이원종(李源宗)정무수석같은 김대통령의 ‘친위그룹’이었다.

김변호사는 비장했다. 김대통령도 “이번에는 젊은 애들 말 듣지 말고…”라는 김변호사의 말에 공감하는 듯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심사숙고해 보겠다”는 말만 했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김변호사가 이날 김대통령에게 거국내각 얘기를 꺼낸 것은 보름 전 김대통령의 말 때문이었다.

역시 청와대에서 김변호사와 마주 앉은 김대통령은 몹시 초췌한 표정으로 “정말 임기가 하루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그만둘 수 있으면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고 김변호사는 회고했다.

김변호사가 “그럼 (대통령 자리를)나한테 넘기라”고 농담을 했는데도 김대통령은 웃지 않았다.

김변호사는 거국내각 얘기를 꺼낸 뒤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오면 뭔가 변화가 있겠지…’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거국내각 대신 고건(高建)내각 카드를 내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김변호사는 신문에서 ‘고건총리 확실’이라는 기사를 보고 곧바로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대통령, 총리 발령을 내지 말고 내일 좀 만납시다.”

바로 다음날 김대통령을 만난 김변호사는 “고건내각을 구성하면 종전과 다를 게 뭐 있소. 내 말대로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손을 뗍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김변호사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김대통령이 뭔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고 싶다는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날인 3월4일 김대통령은 고총리를 지명했다.

그렇다고 김대통령을 향한 하야의 목소리가 수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권, 심지어 그 즈음 김대통령을 만난 민주계 중진들 입에서 “김대통령은 지금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헌정 중단사태가 올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불거졌다.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주자인 이수성고문과 이인제(李仁濟)경기지사가 공개토론에서 “하야나 헌정중단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를 표명한 것도 그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종의 미’에 집착했기 때문이었을까. 김대통령은 5월3일 청와대 비서관 59명과의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청와대가 흔들림이 없어야 국민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임기 말까지 최선을 다할 각오다”라는 말로 세간의 억측을 일축했다.

그리고 김대통령은 한보수사가 마무리된 5월30일 오전10시 대국민 담화를 통해 92년 대선자금 공개는 불가(不可)가 아니라 불능(不能)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선거풍토 혁신을 위한 정치개혁이 정치권의 근시안적인 당리당략으로 좌초된다면 불가피하게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끝내 ‘중대결심’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임기말을 맞고 말았다.

〈김창혁·김정훈기자〉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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