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39]제조물책임법

  • 입력 1998년 11월 24일 19시 49분


93년 개당 2달러도 안되는 1회용 가스라이터를 미국에 팔았던 모 중소기업. 라이터값의 수천배에 달하는 배상소송에 시달려 회사문을 닫을 뻔 했다. 라이터를 처음 켜는 순간 불길이 치솟아 얼굴에 화상을 입은 미국의 한 소비자가 소송을 낸 것. 재판 결과는 ‘처음 켰을 때 화상을 입지 않도록 불꽃세기를 조절할 의무가 제조업체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10만3천달러(요즘 환율로 약 1억3천만원)를 물어줘야 했다.

90년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했던 국내 업체도 추돌사고로 뇌를 다친 소년의 부모로부터 “안전벨트에 문제가 있다”는 제조물책임(Product Liability·PL)소송을 당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고생깨나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피해자측이 안전띠의 결함으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지만 미국에선 제조업체가 ‘안전띠가 사고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반증해야 했던 것.

80년대 초 국내 모 전자회사는 미국에 팔았던 TV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수백만달러의 피해보상 사건에 휘말렸다. 60대 부부가 TV 위에 촛불을 켜놓고 외출했는데 켜진 TV에서 열이 나 화면을 싸고있는 플라스틱 캐비닛이 달아오르면서 초를 넘어뜨려 불을 낸 것. 이 회사는 ‘사용자의 잘못’이라고 항변했지만 미 재판부는 “장시간 TV를 켰을 때 캐비닛 온도가 올라가도록 만든 제조업체의 책임”이라고 판결했다.

모두 ‘상품 결함으로 사고가 날 경우 보상책임을 져야하는’ 미국의 엄격한 PL법 판례를 간과했다가 큰 낭패를 당한 사례들이다. PL법이란 제조물의 결함에 의해 소비자의 신체 및 재산상에 손해가 발생한 경우 제조자 등이 이 손해에 대해 배상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비슷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될까. 국내엔 제조자에 대한 별도책임을 규정한 법률이 없다. 민법을 원용해 가해자(제조자)의 고의나 과실이 있을 경우에만 책임을 지운다. 이 때 피해자 스스로 제품결함과 사고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고 제조업체의 과실을 밝혀내야 한다. 결국 피해자가 큰 비용을 물어가며 소송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다. 강창경(康昌景)소비자보호원 법제실 연구위원의 설명.

“상품이 갈수록 복잡 첨단화하는 데다 제조과정에 여러 업체가 참여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소비자가 특정 대기업과 법리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90년대 들어 ‘소비자 주권’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국내에도 외국 PL취지를 따온 판례들이 가뭄에 콩나듯 나왔다. 96년 6월 H자동차에서 판매한 자동차들이 원인 모를 화재를 내면서 수억원의 보험금을 지불한 D보험이 H사에 제기한 구상금 청구가 대표적 사례. 대법원은 제조업체에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그 이유는 △화재에 제3자가 개입한 흔적이 없고 △자동차를 남과 똑같이 몰고 다닌 만큼 자동차 자체의 결함 때문으로 볼 수 있고 △제조업체가 자동차의 무결함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

올 초엔 품질보증기한을 넘긴 TV가 스스로 폭발,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내준 D보험이 TV제조업체인 S전자에 배상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정상 수신상태에서 사고가 났으니 제품 결함이 의심된다”며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소송을 낸 측이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이런 판결을 얻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 국내에 PL법이 도입되면 재판부 판결에 통일성을 기할 수 있고 소비자의 결함 입증부담도 크게 줄어들 것이란 전망.

PL법은 63년 미국내 한 손해배상사건에서 ‘제조업체의 엄격 책임’을 재판부가 인정한 이후 각종 판례로 정착됐다. 유럽은 68년부터 법제화 논의가 이뤄져 현재 모든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법을 갖고 있다. 일본은 95년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필리핀(92년 7월) 중국(93년 9월)을 포함해 세계 27개국이 시행중이다. 이미 세계 표준으로 자리잡은 셈.

국내에서 PL법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80년에 시작됐다. 그뒤 18년간 국회나 소비자보호단체 등에서 여러차례 입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기업에 큰 부담을 준다’는 주장이 득세했기 때문. 대통령 선거공약의 하나로 ‘PL법 도입’을 내세웠던 김대중(金大中)정부는 최근 ‘내년 상반기 국회 통과후 1년 유예기간을 두어 2000년 시행’이라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소비자문제 전문가들은 물론 상당수 기업들도 “국경없는 경제전쟁 시대에 기업 경쟁력을 빌미로 PL법 도입을 망서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한다. 안전하지 않은 제품은 PL법이 없더라도 외국에 팔지도 못할 뿐 아니라 외제품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

게다가 우리 소비자들은 이 제도가 없으면 외제품 때문에 입은 손해를 구제받는데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또 소보원의 한 관계자는 “PL법이 만들어지면 식품 의약 등 각종 산업별 규제의 상당수가 불필요해진다”는 주장을 폈다.

대기업들의 경우 PL법 제정에 충분히 대비해왔다. TV화재 소송에 휘말렸던 가전회사는 TV캐비닛을 난연(難燃)소재로 바꿨다. 완구 및 자동차업체들도 자체 안전기준을 대폭 강화해놓은 상태. 중소기업들은 “10년간 제품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배상액이 많아 두렵긴하지만 PL법 도입은 대세”라면서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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