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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10월 22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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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경찰의 업무매뉴얼중 ‘건물내 범인체포요령’이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 상황에 도움이 되는 매뉴얼 내용은 이어진다.
‘입구로 마구 뛰어들지 마라. 벽에 기대 실내동태를 살핀 후 들어가라. 문 뒤에 범인이 숨어있는지 꼭 확인하라. 조원끼리 3m정도 간격을 유지하라. 조원중 한명이 범인에게 접근하는 동안 다른 조원은 범인쪽을 겨누고 있어야 한다….’
미국 경찰은 이처럼 자세한 실무매뉴얼을 배우고 익힌다. 현장에선 어김없이 매뉴얼이 제시한 지침에 따라 행동한다. 할리우드 영화속의 경찰도 마찬가지다.
“미국경찰의 업무매뉴얼은 특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대학과 일선경찰이 긴밀히 협조해 과학적인 실험 결과와 현장조사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때문이지요.”(박경식·朴慶植 경찰대학 교관)
업무매뉴얼은 단순한 규정집과는 달리 현장경험과 과학적인 분석결과를 토대로 뽑아낸 실무지침서. 여러 상황에 맞춰 해당 업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묶어놓은 것이다. 과거엔 건축공사 공장운영 등 산업현장에서 주로 활용돼왔으나 지금은 선진국에선 분야를 가리지 않고 널리 쓰인다. 우리나라에선 매뉴얼 작성 활용 사례가 드물었지만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늘 고객으로 북적대는 백화점. 신사복코너 부근 화장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치자. 고객에게 대피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긴급방송이 켜졌다.
“3층 신사복 매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침착하게 대피해주십시요.”
이런 방송이 나간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이다. 화재피해보다는 대피중 발생하는 안전사고가 더 우려될 정도. 롯데백화점의 안전관리매뉴얼에 좋은 해답이 있다.
화재를 발견한 직원은 방송실에 전화를 걸어 불이 난 사실을 알린다. 방송실에선 직원들만 아는 암호방송을 내보낸다. ‘업무연락입니다. 사장님께서는 3층 신사복코너 앞으로 와주십시오.’
암호방송을 들은 전직원은 즉시 업무에서 손을 떼고 차분히 고객들의 대피를 유도할 준비를 한다(2∼3분 소요). 방송실에서 고객에게 화재사실을 알리는 방송을 내보낸다. 직원들은 에스컬레이터의 운행을 중단시킨채 고객들을 가까운 비상계단으로 유도해 대피시킨다. 롯데백화점 방재실 관계자는 “암호방송 방식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모른다”면서 “개점 때부터 외국 백화점에서 배워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누가 생각해냈는지는 몰라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언어화되고 문서화됐을 때 비로소 업계 전체의 지식이 되고 후대에 전달될 수 있는 지식이 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업무매뉴얼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언어화와 문서화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매뉴얼은 실수와 실패를 줄이는데 유용하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셈. 하나은행 곽우석(郭宇錫)차장은 10여년간 중소기업을 상대로 대출업무를 해오면서 나름대로 쌓은 노하우가 많다. 그의 수첩을 들여다보자.
‘거래할 업체 사장실을 직접 찾아가 본다. 평수가 넓고 호화스러운 사장실이 있는 업체는 주의한다. 사장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본다. 주민등록지 이전이 많을 때는 업체도 사장을 닮아 안정적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곽차장은 “은행업무와 관련해 많은 교재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막상 실무에서 쓰이는 가장 실제적인 지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도 부천시에서 발생한 액화석유가스(LPG)충전소 폭발사고 현장. 탱크로리가 터지는 바람에 화재진압중이던 경기도 소방본부 소속 소방관중 24명이 중경화상을 입었다. LPG충전소 화재진압요령에 관한 매뉴얼이 잘 만들어져 이에 따른 교육훈련이 평소에 이뤄졌더라면 예방할 수도 있었던 부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소방관들은 일단 화재진압을 포기하고 한발 물러났다가 탱크로리가 폭발한 뒤 다시 접근해 불을 끄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습니다.”(김상강·金相剛 한국가스안전공사 기술기준처 부장)
소방관들이 탱크로리의 엄청난 폭발력과 폭발가능시간 등과 같은 간단한 사실만 알고 있었더라도 화염에 휩싸인 탱크로리를 앞에 두고 계속 불을 끄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김부장의 설명은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LPG충전소 화재사건이 한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의 폭발실험을 통해 LPG탱크로리의 폭발력과 파편이 날아가는 거리 등에 관한 과학적인 데이터를 확보해놓았습니다. 이를 토대로 매뉴얼을 만들어 소방업무 등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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