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7)

  • 입력 1998년 10월 18일 18시 01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20)

나는 몸을 일으키고 앉아 호경의 머리를 들어올려 안았다. 호경은 힘없이 뿌리쳤다.

―너를 찾아 다녔어.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때론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맹목적으로 너를 찾고 싶었어. 하지만 너를 데리고 갈 곳이 없다는 걸 오늘 알았어. 우리에겐 이제 집이 없어. 다시는 예전 같을 수가 없어. 불가능 해. 너에겐 돌아올 집이 없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아니라 뇌수가 앞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머리가 깨어지는 듯 아파왔다. 그는 다시 창가로 가 바다를 향해 뒷모습으로 앉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잠에서 깨니 호경은 없었다. 화장대 위에 차비가 될 만큼의 지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날 오전에 나는 속이 비치는 실내복을 입은 채 해수욕장의 해변에서 떠나지 못하고 오래도록 햇빛을 받고 앉아 있었다. 말을 탄 남자가 해변의 끝에서 나타나 해변의 끝까지 지나갔다. 말의 발자국이 해변에 커다랗게 깊이 패이고 있었다. 새하얀 햇빛, 새파란 바다, 소나무 숲에서 날려오던 젖냄새 같은 해당화 향기, 내가 젖을 먹여 키웠던 수….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수가 매운 것이 묻은 두 손으로 두 눈을 마구 비비대며 울고 또 울고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그 작은 손을 붙들 수도 손을 씻어 줄 수도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었다. 나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경은 어떻게 지낼가…. 가끔 걱정이 될 때가 있었다. 어쩌면 그는 나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낯선 여자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신청하는 수상쩍은 남자가 되어 있을 지 모른다. 마치 드라큘라에게 목이 물린 사람이 상처 때문에 역시 흡혈귀가 되는 것처럼, 마치 내가 점점 영우라는 그 낯선 여직원을 닮아가듯이…….

우리들의 상처가 그와 나를 한 동안 떠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한밤중 젖은 속눈썹 속에 떠오를 그의 꿈을. 그리고 나의 꿈……. 우리들 생애의 처음을…. 인생의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하나의 꿈속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일어난 일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망각하거나 되돌아가거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거나, 거기엔 그만한 시간이 꼭 필요한 법이다.…. 지금은 가을, 집을 떠난 후 해가 바뀌었다. 그러나 단지 한해가 지난 것이 아니라, 전생처럼 너무나 오래 전의 일 같다. 내가 말 못하는 새나, 물고기나 돌멩이나 물가의 풀이 되지 않고 아직도 사람인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토록 오래 전…. 지나간 한 시절이 이토록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 그 여자가 과연 나였던가? 고갯마루에 있는 국도변의 한 휴게소, 그곳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곳이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그 마을이 여전히 그 곳에 있을까? 지도에도 이름이 나와 있을까? 그러나 지도상에 표기되어 있는 이름 따윈 아무 의미도 없다. 그 마을이 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회오리바람에도 날려가지 않고 아직 그 곳에 있다해도, 지도에 버젓이 이름이 나와 있다해도, 이미 그 마을은 나에게 없다. 환영…. 분명한 것은 지금 그곳엔 아무도 없다는 것. 한 시절 우리가 어떤 인과관계로 모여들어 부싯돌처럼 부딪쳤으나, 그것은 지극히 짧은 한 순간 하늘을 가른 번개이거나 사막의 신기루…. 그런 근거 없는 낭설일 뿐. 그 마을은 텅빈 채 내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아 버렸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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