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6)

  • 입력 1998년 10월 16일 19시 12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19)

그날은 집 앞 테라스에 앉아 부동산 업자와 집을 사려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경이 집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 호경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점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우선 안주인하고라도 계약을 해 두기를 원했다.

흰색 승용차가 한 대 올라오기에 그들인가 했는데 뜻밖에도 공기총을 든 남자 셋이 집 앞에서 내리더니 까치들을 쏘아댔다. 무거운 과일이 떨어지듯 묵정밭 여기저기에 까치들이 떨어졌다. 멍청하게 보고만 있던 나는 메모지와 펜을 챙겨들고 대문 밖으로 쫓아나갔다. 그리고 남자들을 향해 맹렬하게 욕을 해대며 고발하겠다고 차량 번호를 적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두꺼운 옷을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입은 여자가 소리를 질러대자 남자들은 떨어진 새들을 미처 다 줍지도 못하고 우루루 차를 타고 언덕을 굴러내려갔다.

죽어 있는 새들…. 새들은 야생 고양이들의 이빨에 뜯기고 천천히 분해될 것이다. 개미의 먹이가 되고, 벌레들의 먹이가 되고 비와 바람과 흙에 의해 녹는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면 얼마동안 검은 깃털만 공중에 날아오르는 것이다.

공기총을 가진 남자들이 떠난 뒤에 곧 부동산 업자와 집을 사려는 남자가 왔다. 남자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집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호경은 집을 너무 싼 값에 내놓은 것 같았다. 그들이 하자는 대로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었다. 의외로 계약금이 컸다.

남자들이 가버린 후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나갔다. 차는 흙바람 때문에 건조한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 쓴데다 비까지 맞아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운전석만 대강 닦아냈다. 차 뒷좌석엔 이미 두 개의 가방이 꾸려져 있었다. 달리기만 하면 되었다.

집을 떠난 후 꼭 한번 호경을 본 적 있었다. 4개월쯤 지나 자리를 잡고 주소를 옮긴 직후였다. 그는 나를 찾아헤맸던 것일까. 그는 한밤중에 아파트 벨을 눌렀고 허술한 실내복 차림인 나를 그대로 끌고나가 차에 태웠다.

우리는 밤새도록 계속 달려 이른 아침에 설악산을 넘어 온천 마을을 지나 동해안의 한 해수욕장 마을에 도착했다. 그 하루를 어떻게 보냈던가. 절 마당에서, 해안의 벼랑 끝에서, 해변의 모래 위에서, 사람들이 오가는 유원지의 놀이장 근처에서, 나는 금새라도 목을 조를 것 같은 살의와 격정과 절망의 힘이 그의 몸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밤이 깊어서야 바닷가에 있는 ‘해변 모텔’에 들었다. 그는 방에 불을 켜지 않고 텔레비전을 켜 놓고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고 밖에서 사온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올렸다. 파도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불안한데도 너무 지쳐서인지 잠이 몰려왔다. 나는 잠에 빠져들면서 문득 문득 누가 머리카락을 당기는 듯 놀라 눈을 떴는데 그때마다 새까만 그림자처럼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호경의 뒷머리가 보였다.

얼마나 잤을까…. 몸이 비에 젖는 듯한 느낌에 잠이 깼다. 가만히 눈을 뜨니 호경이 침대에 올라앉아 나의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꼼짝 않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자 나의 장단지에 체온처럼 미지근한 물줄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물줄기는 다리를 타고 길게 흘렀다. 호경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울고 있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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