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69)

  • 입력 1998년 10월 8일 19시 04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⑫

계곡길의 마지막 지점에서 죄회전을 해 학교와 반대편으로 달리는 순간은 마치 해일에 휘말려 물의 힘에 나를 맡겨버린 것 같았다. 내 몸은 다른 의지에 의해 높이 높이 들려 올려졌다. 다음 순간 나는 이미 이쪽이 아닌 저쪽에 속해진 것이었다.

호경은 학교에서 수의 그네를 밀어주거나 가겟집까지 걸어가 과자를 사주거나 모래장에서 노는 수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휴게소로 곧장 달려가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공중 전화 부스 앞엔 한 남자가 전화를 걸고 한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서자 전화기에 대고 무어라고 말하고 있던 남자가 둥그런 눈을 치뜨고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기다리던 남자도 힐끗 뒤돌아보았다. 내 뒤에도 이미 한 남자가 와서 줄을 섰다. 깊은 가을의 햇빛이 현기증이 나도록 노랗고 환했다. 상처를 드러내놓고 서 있기에는 지나치게 환한, 숨을 죽인 듯 적요한 한낮.

―… 미흔이에요.

목이 부어올라선지 목젖이 아직도 눌리는 기분이었다. 말이 아니라 불에 구운 뜨거운 모래가루가 새어나오는 듯 목이 아팠다.

무슨 서류라도 읽고 있는지 고개를 수그리고 전화를 받는 듯한 규의 음성은 너무나 예사로왔다.

―응응, 어디 있어요?

―휴게소예요.

―… 목소리가 이상하네… 무슨, 그래요. 곧 거기로 갈게.

도로에 커다란 트레일러가 지나가고 소음 때문에 나는 한쪽 귀를 손으로 막았다.

―아뇨… 오지 마세요. 오지 말라고 전화하는 거예요.

나는 다급하게 저지했다. 정말이었다 그가 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벗겨진 살갗 때문에 얼굴에 불이 떨어진 듯 뜨거웠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집에 오거나 전화해서는 안 되요. 이제 만날 수 없을 거예요.

눈물이 스며들자 얼굴과 목의 상처가 따갑고 쓰라렸다.

―거기 있어요. 거기 가만히 있어요. 지금 바로 갈테니, 움직이지 말고 있어요.

―아뇨, 오면 안돼요.

전화는 갑자기 끊어졌다. 내가 돌아서자 기다리던 남자가 상처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쏘아보았다. 다 알겠다는 듯이. 너 같은 여자는 그렇게 얻어맞고 다녀도 마땅하다는 듯 두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나는 차를 몰고 핑계거리를 위해 약 같은 것을 하나 사서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를 만나고 있을 틈도 없지만 다친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다시는 그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금지가 내 속에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호경이 휘두르는 폭력이거나 아니면 불붙은 듯 미쳐날뛰는 호경의 다친 마음… 나는 공포에 질려 있었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다리가 떨리면서 머리끝과 등줄기로부터 싸늘한 땀이 물처럼 흘러 내리더니 재가 날리는 듯 눈앞이 어두워졌다. 집으로 가야해, 하면서도 누렇게 말라가는 잔디밭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버렸다. 깊은 웅덩이 속에 빠진 것처럼 오한이 들고 눈 앞이 캄캄했다. 그 캄캄함 속에 늦가을 장미 한송이가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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