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68>

  • 입력 1998년 10월 7일 19시 04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⑪

호경은 소주병을 벽에 던지고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조용히 내뱉고 나를 내려다 보더니 나가버렸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 집을 떠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가 모르게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차 소리를 내지않고는 떠날 방법이 없었다. 잠이 들 수도 없었다. 몽롱함의 끝에서 미끄러지듯 빠르게 잠 속으로 밀려가다가도 마치 허공에 누워 있다가 뒤집혀 검은 심연으로 떨어지듯 화들짝 깨어나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독극물이 스며든 듯 두통이 몰려왔다. 뒷머리가 너무 아파 반듯하게 누울 수가 없었다. 엎드리고 있었는데 눈에서는 미지근한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다음날 오후 3시, 규와의 약속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 위에 표시한 부표에 불과한 그 약속…

호경이 외출하는 때는 수를 학교에 태워다 줄 때와 데리러 갈 때 밖에 없었다. 나는 호경이 수를 데리러 나간 뒤 몸을 일으켰다. 목이 부러진 꽃줄기처럼 덜걱거렸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부어오른 데다 시멘트 바닥에 갈려 피부가 벗겨지고 목을 따라 길게 검은 손자국과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은 나라고 할 수 없는 상처 덩어리였다.

약속을 취소하기 위해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자 전화가 아직 불통이었다. 포크레인 기사가 전화선을 건드린 뒤 아직 고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약속에도 나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규는 약속 장소에서 곧장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호경은 그와 대면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보니 온 몸 여기저기에 피부 이식 수술이라도 한 듯 낯설게 느껴지는 커다란 피멍 자국들이 나 있었다. 발목까지 감싸는 울 코트를 입고 털실로 짠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쏜살같이 나가 차를 타고 달렸다.

뒤따라 달리는 것이 호경에게 발견되어서도 안되고계곡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수를 데리고 돌아오는 호경의 차와 마주쳐서도 안되었다. 오직 그 일념으로 차를 달리던 나는 모퉁이를 돌다가 호경의 차가 계곡길에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급정거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계곡 아래 수몰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마을 하나가 불길에 다 타버린 연기였다. 집과 마을의 길들과 장롱과 농기구들과 소여물과 옹기와 신발들과 낡은 가방들이 그대로 물에 잠기는 줄로 알았는데 알고보니 불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불길은 이미 다타버렸고 검은 잿더미에 바람이 불때마다 짐승의 갈라진 뱃속같은 붉은 속불이 드러났다가 덮혔다가 했다. 마을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잿더미속에서 규와 처음처럼 입맞춤을 했던 마을 뒤의 늙은 나무가 있던 자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고보니부희의집도 무너지고 없었다. 지붕이었던 슬레이트 조각과 나무 기둥만 뒤집혀진 붉은 흙속에 반쯤 묻혀 있을 뿐이었다.

호경의 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경의 차가 다음 모퉁이를 돌아가기를 기다려 다시 차를 움직였다. 계곡길이 끝나는 지점과 학교까지의 거리 자체는 2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수가 교실 안에서 늑장을 부리거나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기라도 한다면 5분쯤은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운이 나쁘면 그와 계곡의 갈래길에서 마주치거나 최소한 차의 꽁무니가 그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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