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 (61)

  • 입력 1998년 9월 27일 18시 29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④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몹시 낯선 공기를 느꼈다. 그것은 내 몸속의 공기였다. 그 공기는 다가올 운명에 대한 나의 결의였던가, 아니면 운명에 대한 예감이었던가. 분명 이상한 느낌속에서 나는 깨어났다. 내 속에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그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우체국으로가서 규를 만나고 무슨 말이든 하고 그만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초겨울 같은 날씨였다. 숲에는 깊은 가을이 와 있었다. 생강 나무는 노랗고 옻나무는 피가 맺힌 듯 붉고 칡넝쿨 잎은 황금빛을 내었다. 참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밤나무들이 모두 제각기 물들인 잎사귀를 바람에 떨어뜨릴 때, 그 순간이 마치 자신의 절정인 것처럼 공중에서 잠시 멈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떨어진 낙엽들은 새로 찍어 낸 지폐같은 찬란한 빛을 내며 숲에 쌓였다. 소녀들이 왜 낙엽을 모으는 지 이해가 되었다. 나도 스웨터를 꺼내 입고 새벽 숲으로 들어가 낙엽 몇 잎을 주워 두꺼운 책에 끼워넣었다. 예쁘게 말린 뒤 잘 배열해 코팅을 해서 수의 식탁 받침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밥을 안치는데 포크레인이 한 대 집으로 올라왔다. 전날 호경이 부른 모양이었다.

억지로 잠에서 깬 호경은 포크레인 기사에게 연못 팔 위치를 설명하고 크기와 모양에 대해 의논을 했다. 잔디에 대해 내가 묻자 몸집이 작고 햇볕에 까맣게 그을은 포크레인 기사는 자신이 잔디를 사다 줄 수는 있지만 잔디는 잘 죽기 때문에 4월경에 옮겨 심어야 한다고 했다.

호경은 목책과 낮은 대문과 부엌 앞에 만들 테라스에 관해서도 이야기 했다. 포크레인 기사는 자신이 일 잘하는 목수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호경은 며칠 계속 몸살 기운이 있다고 투덜대며 수를 태우고 떠나고 포크레인 기사는 일을 시작했다. 포크레인은 커다란 바위를 이리 저리 굴리더니 아주 쉽게 들어다가 얼기 설기 포개기 시작했다.

예기치 않게 포크레인 기사가 일을 하게 되어 나는 꼼짝 없이, 우체국에 갈 계획을 오후로 미루었다. 나는 몸에 힘을 죽 뺀 채로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들을 넌 뒤에 포크레인 기사의 새참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화장을 꼼꼼하게 하고 다시 기사의 점심을 만들어 주고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전화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포크레인 기사는 실은 바닥을 파다가 전화선을 건드린 것 같다고 미안해했다. 나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수를 태우러 나갔다.

우체국에 가 보니 규의 차는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간 것 같았다. 학교 앞 농협 창고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 앉아 있으니 규의 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를 세워 둔 채 화들짝 달려나갔다. 그의 차가 출장소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그 공무원 아가씨가 내리더니 차안의 그를 향해 손을 짧게 흔들고 들어갔다. 규의 차가 방향을 틀더니 빙글 돌아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길의 한가운데를 밟고 걸어갔다. 머리 위에 물 그릇을 이고 걷듯이 천천히…. 텅빈 길에 입에 재를 묻힌 듯 검은 점이 박힌 흰색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곁을 지나가고 구멍가게 노파가 평상 위에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내 앞에서 규의 차가 멈추어 섰다. 나는 차문을 열고 곁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으로 그의 머리를 두 차례 후려쳤다. 규는 놀라지도 않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차를 길 가장자리로 세웠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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