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41)

입력 1998-09-03 19:03수정 2009-09-25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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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달의 잠행 (17)

―남자들이 할머니 방에서 잔 날은 자기 집 일은 못해도 저 할머니 농사일은 해 주었대요. 그러니 온 마을 남자들의 든든한 노동력을 밑천으로 살림을 일으킨 거지. 마을 여자들과도 수도 없이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웠대요. 그런데도 마을 여자들이 완전히 쫓아내지를 않았다는 거예요. 오히려 나중에는 한 달씩 돌아가면서 남편을 빌려 주었다나요. 친척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점도 있었거든. 저 할머니 덕분에 다른 마을 남자들과 달리 이 마을 남자들은 읍내에 나가 기웃거리지도 않고 공연히 바람이 나서 타지로 나돌아다니지도 않고 노름도 하지 않았고 서로 힘 경쟁을 하면서 마을 안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평생토록 재미나게 잘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저 할머니가 얼마 전에야 일본에 남편이 버젓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고민 끝에 일본까지 만나러 갔더니 겨우 한 달 살고 평생 동안 자신을 버렸던 남편이 일본 여자랑 결혼해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잘 살고 있더래. 저 할머니 침을 탁 뱉고는 두 말도 않고 돌아왔어요. 그 일 있고 난 뒤로는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요. 동네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는대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잠시도 집에 있지 않고 온 들과 산을 쏘다니면서 일만 하는 거예요.

나는 할머니가 파묻혀 있는 홍화밭쪽을 쳐다 보았다. 뭉쳐놓은 비닐더미같은 파란색 우의가 보이고 그 위로 낮게 까치 몇 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때 규의 차가 언덕길을 지나 올라갔다.

―저 윗집 남자는 어떤 사람이예요?

―음, 체로키 타고 다니는 남자…, 생긴 거 봐요. 여자깨나 후리게 생겼지. 까다롭고 세련되고, 키 크고 게다가 남자 치곤 예쁘게 생긴 사람이지. 음성도 야하고…,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본 적 있죠?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봐도 매력 있지?

나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작년에 이 인근 마을 땅을 많이 사 가지고 들어왔어요. 이 산에만 해도 땅이 제법 많다고 들었어. 원래 부잣집 아들이어서 최근에 유산상속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본업은 우체국장이 아니라 투기꾼들에게 돈 될 땅을 소개하는 손 큰 부동산 업자라는 말도 있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을 해 한 밑천 잡았다고 하기도 하고…. 마누라는 고급 레스토랑을 하는 사람이라는데, 가끔 와요. 자그마하고 통통한 여자인데 나이가 한 두 살 더 많다고 들었어요. 아이들도 그 여자의 애들이고. 남자와 결혼해 낳은 애는 없다고 하던데…

나는 애선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있었다. 내 눈은 그와 낚시를 하던 바닷가의 오후, 그 숲속의 시간속을 헤매고 있었다.

애선이 돌아가고 난 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장대비가 운무까지 동반해 대숲처럼 앞이 안보이도록 내렸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다. 수를 데리러 학교에 가니, 휴게소집 딸이 수의 우산을 함께 쓰고 교실에서 나왔다. 보통 때보다 일찍 마쳤는지 교실에 다른 아이들은 없었다. 대부분은 학교 마을의 아이들이었다.

―엄마 이 애 오늘 버스를 놓쳤어.

휴게소 집 딸은 버스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수업을 조금 더 일찍 마치고 나가곤 했다.

―타. 아줌마가 태워 줄게.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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