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미룰 수 없다⑦]공부안하는 의원들

  • 입력 1998년 9월 3일 18시 28분


지난달말 국회 재정경제위. 교통세법 개정안을 심의하는 도중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한 의원이 갑자기 “다른 세금은 그냥 몇 % 인상이라고 하는데 교통세는 왜 ℓ당 몇 % 인상이라고 표현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답변에 나선 재정경제부의 한 고위간부는 “양(量)에 붙는 세금을 종량세라고 하고 가격에 붙는 것을 종가세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종량세이기 때문”이라고 ‘자세하게’설명했다.

이처럼 국회 상임위의 법안심의과정에서는 종종 법안에 대한 심도깊은 토론보다는 의원들의 무지로 용어설명이나 개념확인 등 법안내용을 이해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보니 정작 법안의 핵심쟁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기보다는 법안내용이 대강 뭔지를 훑어보고 그냥 원안통과시키는 예가 수두룩하다.

이는 무엇보다 의원들이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입법심의에 대한 사전준비와 연구가 매우 소홀한 탓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함께 1백만권 이상의 장서를 가진 국내 양대도서관중 하나인 국회도서관에서 의원들의 얼굴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도 우리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입법연구활동에 소홀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국회도서관측에 따르면 7월 한달동안 국회의원과 의원보좌직원이 자료를 열람 또는 대출해간 이용횟수는 7백60건. 하루 27명이 이용한 셈이다. 이 중에서도 의원 본인이 직접 도서관을 찾은 사례는 국회도서관 직원들 사이에서 ‘대외비’로 통할 정도로 극히 드물다.

의원들이 입법연구활동에 소홀한 것은 한마디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지역구의 각종 행사나 계보모임 등에 참석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야당중진의원은 국회가 열리지 않을 때는 하루종일 지역구민을 접대하느라 발에 땀이 날 지경이다. 당에서 회의가 없는 날이면 아침 6시경 동네 약수터에 나가 지역구민과 인사를 나눈 뒤 지구당 당직자나 민원인들과 아침식사를 든다. 이어 지역구내의 각종 행사에 참석, 눈도장을 찍은 뒤 오후에 잠깐 한숨을 돌리고 나면 저녁에는 계보모임이나 동창회 등에 나가야 한다. 1주일에 두세차례는 저녁 술자리까지 마련돼 있다.

이같이 국회본연의 입법활동과는 무관하게 바쁘기만 한 우리 국회의원들의 하루 일정은 미국 의회의 의원들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는 1년에만 4천여회의 각종 위원회 회의가 연중 열리고 있고 이 때문에 의원당 하루 평균 2,3차례의 회의에 출석해야 한다. 또 소그룹정책토론모임 직능단체리셉션 등으로 일정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시간이 없다’는 의원들의 항변도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 의원회관에 있는 건강관리실(사우나시설)이 국회도서관보다 훨씬 성황을 이루고 있는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 국회 사우나의 경우 대략 하루 평균 40여명의 의원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한 의원의 전언이다.

지난달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이었던 한 의원은 예결위 전체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동안 오후 내내 이곳에서 사우나를 즐기다가 동료의원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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