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21)

  • 입력 1998년 8월 11일 19시 23분


의사는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이상이 없다고 했다.

―직접적인 뇌손상은 없습니다. 머리 밑에 튀어 오른 부분은 일종의 결절입니다. 시간이 가면 저절로 풀립니다. 그리고 머리가 빠진 자리는 다시 나게 됩니다. 약을 드시고 만일 두통이 계속 되면 다시 오십시오. 혹시 진단서가 필요하신 가요?

그렇다면 무엇이 두통과 단편적인 기억상실증을 야기시키는 것일까. 사진에 찍히지 않는 이 손상의 정체…… 미흔은 그것을 알고 있을까? 그녀가 달려가는 그 길도 실은 그 통증에 격렬하게 등이 떼밀린 행위일 것이었다. 통증은 그녀의 등을 후려치며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미흔은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마른빨래 조각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미흔은 그렇게 계속 달려가서 태백까지 갔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달리다 보니까, 태백엘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태백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두웠어. 꼭 석탄자루속 같이 불빛 하나 없이 까맸어. 이따금 유리창이 깨어지고 문짝이 떨어진 버려진 아파트들을 지나갔고,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 듯한 낮은 상가 거리를 지났어. 태백엔 늦은 밤에 도착했어. 그곳이 태백이라서가 아니라, 꼭 연탄을 갈고 구멍들을 통해 그 아득한 밑불을 내려다 볼 때 같은, 그 정도의 빛, 그런 어둠, 그런 매캐함의 도시였어. 희미한 빛 한줄기에 포도알처럼 많은 어둠이 달라붙어 있는 도시.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려고 했어. 멀리서 그나마 가장 밝은 곳으로 보였던 곳이었는데, 고등학교와 전문학교, 아파트 단지가 연결되어 있는 작은 거리였어. 빵가게와 분식점과 식육 식당이 보이기에 차를 세우고 곧장 식육 식당 쪽으로 갔어. 식육점 앞 인도에 연탄불 화덕 세개가 조르르 있었어. 참 낯선 옛날 풍경이었어. 식당의 문은 식육점의 출입구였어. 축 늘어진, 없어진 머리 외에는 온전히 그대로인 채 배 목에서부터 가랑이 부분까지 활짝 열어 젖혀진 붉은 돼지고기 덩이가 천장 한가운데에 매달려 있었지. 식육점 안엔 오래된 타월에서 나는 텁텁하고 시큰한 냄새가 났어. 난 식당 남자의 안내를 받아 왼쪽에 붙은 홀에 들어섰어. 홀에는 여자 손님이라고는 한 명도 앉아 있지 않았어.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은 가운데 연탄 화로가 달린 철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소주와 숯처럼 검게 구운 고기를 상추나 파에 싸서 먹으며 서로를 향해 동시에 거칠게 떠들어대는 분위기였거든. 시멘트벽과 천장에는 그을음과 양념장이 튄 자국들, 거듭거듭 찍힌 파리똥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자주색 얼룩들이 묻어 있었고 바닥은 휴지와 나무젓가락 봉지, 꺾어진 나무젓가락과 찢어진 상추잎 이쑤시개 등등이 깔려 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식당.

난 일인분을 시켰어. 그런데 여기와는 달랐어. 일인분이 정량 한 근인 거야. 6백g 말이야. 난 한 근의 고기를 묵묵히 연탄 화덕에 굽기 시작했어. 남자들이 나를 넘겨다 보았어. 투박하고 무심한 시선, 호기심어린 순진한 시선, 몸을 훑는 듯한 게걸스러운 시선… 시선들은 손을 내저어도 달아나지 않는 굼뜬 파리 떼처럼 노골적으로 들러붙었지. 난 천천히 오래오래 먹었어. 이빨이 아프도록 오래오래…고기를 씹으면서 내가 곧 집으로 돌아갈 거란 걸 알았어. 그 남자들이, 그 식당집이, 바깥의 어둠이, 내 입에 든 고기의 살점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으니까.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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