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17)

  • 입력 1998년 8월 6일 19시 30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17)

―행복하세요?

영우가 묻자 미흔이 소리 없이 짧게 웃었다. 미흔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영우가 냉정하게 말했다.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이죠. 행복하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같아.

영우는 찬장 위 화병에 꽂혀 있던 종이 태극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수가 놀이방에서 만들어 온 첫 작품이어서 미흔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방향이 바뀌었어요. 나무 젓가락 깃대를 반대편에 붙여야 맞아요.

나와 미흔은 동그래진 눈으로 종이 태극기를 다시 쳐다보았다. 맞는 지적이었다. 영우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왠지 마음이 참담해졌다. 미흔도 그랬을 것이다.

영우는 어떤 전체, 이 집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전체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웃고 있는 영우의 눈은 그런 예리한 지적을 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풀려 있었다. 미흔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아주머닌, 아무것도 몰라….

영우가 갑자기 희고 통통한 손을 들어올리더니 나의 팔의 잔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무 부드러워서 따뜻한 연기로 만들어진 손 같았다. 나는 살 속으로 번개가 지나가는 듯한 뜨거운 통증을 느끼며 황망하게 뿌리쳤다.

―오빠, 어디 여행가?

영우는 거실 한가운데 꾸려놓은 여행 가방을 보며 조는 듯한 음성을 내었다. 미흔은 마비된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영우가 갑자기 반말을 하며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빠, 나도 따라가면 안돼?

영우가 이번엔 손을 나의 얼굴에 갖다댔다. 나는 고개를 뒤로 뺐다. 그때 미흔이 천천히 의자 위에서 일어섰다.

―난, 먼저 자야겠어. 두 사람이 이야기해요.

나도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미흔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아냐. 이 앤 곧 갈 거야.

나는 영우를 돌아보며 빠르게 말했다.

―영우야, 그만 가라.

영우의 눈이 불빛에 부딪쳐 번쩍 빛났다.

―싫어, 나 오늘 안가. 나 오빠와 함께 있을래. 여기서 재워줘. 안가.

영우의 눈에서 갑작스럽게 눈물이 넘쳐 뺨에 흘렀다. 나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영우의 눈물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미흔의 얼굴이 눈으로 만든 것처럼 창백하고 냉냉했다. 미흔은 영우를 차갑게 내려다 보더니 욕설이라도 하듯 신랄하게 내뱉었다.

―이제 보니, 너 웃기는 애구나. 여기선안돼. 여기선 안된다는 걸 정말 모르니? 잠을 자든 섹스를 하든, 네 정신나간 오빠와 여관방에 가서 해.

그리고 나를 향해 일침을 놓았다.

―오빠라니, 구역질 나. 그러면 더 재미있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뭇거리다가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고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허둥거리며 화장실로 갔다. 내가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고 나왔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미흔의 날카로운 비명….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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