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15)

  • 입력 1998년 8월 4일 19시 35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15)

―한동안 그 여자를 증오했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다니. 누군가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기 위해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다니… 하지만 그것이 내가 그 여자에게 준 고통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평생동안 계속될 오빠의 고통을 떠올리면 지뢰를 밟고 선 것만 같아. 꼼짝할 수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살이 터져버리는 것만 같아. 난,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리고 싶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남자를 받아들인, 가장 더러운 창녀가 되고 싶어. 오빠, 내게 들어와. 제발, 나를 마음껏 짓밟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사정없이 망가뜨려 줘….

그리고 2년 전 그 날이 된다. 영우가 밤중에 우리 집에 들이닥쳤던 그날.

나는 여름 휴가의 첫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우가 다니던 광고사 사무실이 문을 닫아버려 그녀는 실업자 신세였다. 영우는 나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와의 관계가 4개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조금씩 몸을 빼내며 소극적으로 영우를 만나왔다.

상처입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영우는 학대받기를 원했다. 정신적으로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럽고 히스테릭하며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흥분했을 땐 자신에게 욕을 하라고 사정했고, 일주일쯤 멍이 들 만큼 몸의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를 입혀주기를 원했다. 동시에 나의 몸도 이빨로 물거나 할퀴었고, 흥분했을 땐 자기를 버리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아내를 한번 보고 싶다는 둥, 얼굴은 어떻게 생겼느냐, 가슴은 큰가 작은가? 삽입했을 때의 느낌은 어떤가? 등등을 자주 자주 물었는데 그것이 나를 긴장시켰고 불안하게 했다.

나는 본질적으로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어서 아내에 대해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또 소유에 민감해서 가정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려는 남자이고, 남녀간의 부정하게 떠도는 어지러운 관계를 경계했고 교통법을 지키듯이 결혼의 규율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러니 나의 의식이 작동하자마자 나는 영우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영우가 조심성이 없는데다가 심리적인 노출증도 있어서 사무실의 오퍼레이터들에게 이야기를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애가 전화를 걸고, 오빠라고 부자연스럽게 부르는 것도 점점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전화는 미흔이 받았다. 우리는 다음날 짧은 여행을 떠나기 위해 가방 속에 옷을 챙겨 넣고 있었다. 미흔이 전화를 받더니, 수화기를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으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어떤 아가씨가, 영우라고 하는 아가씨가 지금 우리 집에 오겠대.

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 것 같았다. 미흔은 바로 그때부터 긴장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래요. 들르세요.

내가 전화를 받으려고 하자 미흔은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왜 오라고 하는 거야. 이미 늦은 시간이잖아.

내 언성이 높아졌다. 미흔은 시계를 보았다. 9시 45분이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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