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완상/동아일보 발행인의「시국제언」을 읽고

  • 입력 1998년 7월 27일 19시 50분


남북관계의 현주소는 한마디로 불신과 증오와 대결의 심화 바로 그것이다. 평양이 통일을 외치면 서울은 그것을 즉각 적화통일로 받아들이며,서울이 통일을 강조하면 평양은 대번에 흡수통일이라고 비판한다. 통일의 외침이 커질수록 불신과 증오와 대결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7·4 남북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같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함께 발표했어도 그것은 남북관계를 한발짝도 진전시키지 못했다.

그간 남북의 강경냉전세력은 서로를 가장 불신하고 증오하면서도 위기상황에서는 어김없이 서로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해 기존의 불신과 대결을 더욱 증폭시켜온 셈이다. 우리는 북풍공작에서 극명하게 이같은 역설적 현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적대적 상호주의 탈피 ▼

이제 남과 북은 분단된 채 각기 건국 50주년을 맞고 있다. 20세기의 좌우 이데올로기시대도 지나가고 있다. 21세기 새로운 정보화시대와 냉전이후시대는 새로운 발상과 실천을 엄숙히 요구하고 있다. 햇볕론이 새롭게 각광받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정부는 햇볕정책의 시대적 적합성과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일관성 있게 관철시켜 평화와 번영이 흐르는 21세기로 우리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

햇볕론은 첫째 상대방을 강제로 변화시키려는 냉전적 대북정책이 아니다. 상대방이 스스로 자기들의 낡고 잘못된 관행과 사고를 벗어버릴 수 있도록 보다 따뜻한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이다. 봄날같이 따뜻한 환경에서 두꺼운 외투를 입을 필요가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일방적 흡수통일책이 결코 아니다.

둘째로 평화와 협력의 햇볕은 상대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낡고 음습한 관행과 사고를 변화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남북 모두 지난 반세기 동안 냉전문화와 구조의 재생산에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었다. 햇볕은 남북의 냉전음지를 모두 화해협력의 양지로 변화시켜 민족공영을 이룩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적대적 흡수통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셋째, 햇볕정책은 결코 연약한 정책이 아니며 그렇다고 교만한 정책도 아니다. 그것은 강인하고 합리적이며 포용적인 정책이다. 오늘까지 남북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적대적 상호주의 전술로 서로의 몸과 혼에 상처를 입혀왔다.

물론 남북간의 총체적 힘이 엇비슷할 때는 적대적 상호주의 전술이 필요하다. 허나 지금 힘의 균형은 깨져버렸다. 보다 여유있는 쪽에서 마땅히 더 합리적이고 더 포용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햇볕을 쬐어주어야 할 도덕적이며 현실합리적 의무는 먼저 여유있는 남쪽에 있다. 이 여유가 바로 강인함과 도덕성의 표현이다.

넷째로 햇볕정책은 한반도 주변국가 모두가 지지하는 국제성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포용정책 틀 속에서 미국의 대북유화정책은 일관성있게 추진될 것이다.중국도 러시아도 일본도 북한의 파열착륙(Crash Landing)을 원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는 냉전국가는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햇볕론은 국제적 지지를 받고 있는 21세기의 정책이다.

그런데 지난번 강릉과 속초에서 생긴 사건으로 햇볕론은 남북의 강경냉전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다소 주춤거리는 듯하다. 그러나 만일 정부가 시커먼 구름만 보고 겁에 질려 햇볕의 힘을 스스로 과소평가한다면 지난날 문민정부의 그 뼈아픈 실수를 반복하게 될 터이다.

남북관계는 악화될 것이며 한미관계는 다시 삐걱거릴 것이고 주변국가들로부터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건국 5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날 남북당국은 냉전대결을 강화시키는 가운데 자유와 인권, 정의와 평화를 조직적으로 훼손시켜 왔다. 그간 남쪽은 그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민주화를 착실하게 추진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가장 튼튼한 안보는 국민이 스스로 지키고 싶은 자유 정의 평화를 누릴 때 비로소 가능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평화와 화합의 땅으로 ▼

이러한 때 제2의 건국사업을 정당하게 펼치고자 한다면, 먼저 부끄러운 냉전 고도(孤島) 한반도를 탈냉전화시켜 평화와 화해협력의 땅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한반도 남북으로 평화와 협력의 강물이 저 한강물처럼, 저 대동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일에 대통령은 의연하게 앞장서서 햇볕론을 일관성 있게 펼쳐야 한다. 그럴 때 역사와 겨레와 세계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제2의 건국을 앞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완상<전 통일부총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