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하용출/한-러 관계의 명암

  • 입력 1998년 7월 22일 19시 16분


지난 6일부터 시작된 러시아와 한국의 외교관 축출을 둘러싼 공방전이 마침내 러시아의 한국외교관 추가 출국조치로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이번 사건은 90년 외교관계 수립 이후 가장 큰 외교적 스캔들이었다.

이 스캔들의 원인은 러시아의 이례적인 언론발표 외에 별로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 사태 추이를 보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반추함으로써 한―러관계의 발전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존심싸움 인상 짙어 ▼

러시아의 이번 조치를 지금까지 한―러 관계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오랜 외교전통 관례를 지켜온 러시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시안적인 접근으로 많은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양국간의 ‘에고(Ego)다툼’으로 보도했고 그 결과 상충되는 해석들이 속출했다.

우리 자체의 문제를 돌이켜 보기 전에 러시아 내부의 갈등이나 음모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러시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비슷한 선례를 갖고 있다. 요컨대 이번 사건이 규모와 성격에 관계없이 자존심싸움으로 비친다는 사실 자체가 한―러관계의 성격과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러시아는 쇠퇴한 초강대 국가로 자존심에 상당히 민감하다. 특히 최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확장, 세계각국에서 분쟁조정자 역할의 약화와 축소 등으로 그들의 영향력 유지에 부심하고 있는 터다. 반면 한국은 정반대 이유로 자존심에 민감하다. 신흥 경제성장 국가로 한국은 지난 10여년간 대내외적인 인정을 강하게 추구했다. 이같은 상반된 자존심 경쟁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쉽게 냉정함을 잃게 했다.

물론 러시아 내부사정은 이번 사건의 파장과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현재 러시아 내부의 기강단속에 열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외무성뿐만 아니라 전 국가기관이 타깃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번 외교관 추방 사건이 터진 것이다. 국가 조직의 해이와 기강의 문란은 지금 러시아 사회와 체제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러시아 내부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파악하면서 정보수집 및 외교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필요에만 급급하여 돌진할 경우 이러한 사태는 재발될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이번 사건은 우리에 관한 러시아의 인식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러시아 언론들은 이번 사태의 배경으로 한국의 돈쓰기공작을 거론하고 있다. 심지어 각종 세미나 참석까지도 공작용으로 보는 지나친 판단도 나타나고 있다.

왜 이러한 인식이 나오고 있는가. 우선 성급한 북방외교 추진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우리와의 외교관계에서 경제적 이득을 기대했고 우리는 러시아를 대북한 압력용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단기적 이익추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외교관계 강화를 소홀하게 했다.

특히 수교과정과 그 이후 우리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많은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이러한 물량공세는 대부분 북한 전략과 연관돼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과 진정한 대화를 통한 관계개선보다는 무수한 약속의 파기와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다. 여기에다 지역환경과 한반도 사정은 러시아의 역활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와 함께 우리의 강대국 관리미숙으로 인해 균형감각을 잃은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흔히 우리에게 왜 같은 말을 중국이 하면 가만히 있고 러시아가 하면 들고 일어나느냐고 푸념하기도 한다.

▼ 대화채널 다각화 시급 ▼

이번 사건에서 또하나의 교훈은 대외관계에서 자금이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상과 목적을 분명히 하여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 상황의 정확한 파악은 물론 대화채널의 다각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단절된 대러시아 로비집단의 재구축이 절실하다. 러시아 본류그룹과의 접촉이 확대돼야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강대국 외교에서의 균형감각이다. 일천한 강대국 관리경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강대국 관리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한국과 러시아는 외교관계수립 이후 그 기간에 비해 너무 빠르게 발전한 감이 없지 않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양국이 지금까지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로운 관계정립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용출(서울대교수·외교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