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69)

  • 입력 1998년 7월 13일 19시 18분


추수도 끝날 무렵이었으므로 농사 일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예민해진 언니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대놓고 언니에게 말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봉순이 언니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게게 젖을 물리고 잠들고 그리고 밤이면 일어나 앉아 흐믓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긴 편지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모래네 이모와 몇번의 통화가 오간 후 어머니가 우리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얼굴은 아주 굳어 있었다. 리어카로 날라져온 김장배추가 마당에 작은 동산처럼 널부러져 있던 날이었을 것이다.

―봉순아, 애기 애비 어디 있니?

방안에 널려 있던 기저귀를 개던 봉순이 언니의 손길이 문득 멎었다. 그때 봉순이 언니의 얼굴은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아이를 빼앗아가려고 덤벼드는 걸 본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모, 래네… 이모 말이… 맞는 거냐?

어머니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렇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제발 아니라고 해다오, 하는 절박함이 어머니의 얼굴에 어렸다. 봉순이 언니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럼 그렇다면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그런 상태라는 걸 속였단 말이냐? 세상에나 세상에나 속일 게 따로 있지! 어떻게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러잖아도 처음 봤을 때, 얼굴색 파란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어떻게… 천하의 나쁜 인간들 같으니라구 어떻게 그런 사실을 숨길 수가 있는 거야 어떻게!

어머니는 말을 하다가 끊고 말을 하다가 끊고 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봉순이 언니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속인 거 없어유, 아줌니. 그 사람 결혼하기 전에 지한테 다 말했어요. 허지만 꼭 나슬거라구, 요즘은 약두 좋아졌으니께 꼭 나슬거라구 해서…. 아줌니 걱정 마세유, 꼭 나슬 거예유 그사람 지는 아직두 그렇게 믿구

―시끄럽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구 하니? 그런 너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다 알구선 결혼을 했단 말이니? 이것아…

어머니는 더 말하기가 괴로운 듯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글쎄 아주머니 걱정 마세유, 큰집서두 지한테 걱정 말라구…

―봉순아, 아무래도 이 아줌마가 옛날에 널 우리집에 잘못 데리구 온 것 같다. 대체 왜 이렇게 풀리는 일이 없는 거니, 응… 그래 니말대루 장서방 마산요양소서 병낫구, 그래 그러믄 좋지. 하지만 만에 하나 아니믄, 그땐 넌 어떻게 할래. 막말루다 애기 큰아버지두 그 병으로 후사없이 죽었다믄서 장서방 마저 그러믄, 결국 너 속여서 데려다가 그집 아들 하나만 건진 셈이 되는 거다. 게다가 약값이며 농사일은 어떻게 할래? 니가 애 데리구 니가 이 창창한 나이에 니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하믄 좋단 말이니? 응?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같이 순한 봉순이 언니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지만 언니는 거짓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지영 글·오명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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