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 60]군개혁/하나회장성 쿠데타 모의설

  • 입력 1998년 6월 15일 19시 53분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채 안된 93년7월 중순 국군기무사령부는 비상상황에 돌입했다.

교육사령부 참모장 최승우(崔昇佑·육사21기)소장을 중심으로 한 전현역 하나회 장성들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보고서 때문이었다.

문제의 보고서는 기무사가 자체 입수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기무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호된 질책과 함께 내려온 것이었다. 군부내 쿠데타 방지 임무를 담당하는 기무사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용지 수십장 분량의 이 보고서는 쿠데타 모의자들의 인적사항과 접촉일시 등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군 정보소식통이 전한 보고서 내용.

“4월17일 정기인사시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대전의 교육사 참모장으로 전보된 최승우소장이 3월 초 전격 해임된 김진영(金振永)육참총장과 현역인 K중장 등과 함께 군사반란으로 문민정부 전복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대전의 W다방 등에서 현역 및 예비역 동조자들과 비밀리에 수차례 회합해왔다. 쿠데타 모의그룹은 미국 하와이에 사무실을 얻어놓고 거사자금을 관리하고 있으며 K장군의 부인이 자금관리책으로 연루돼 있다.”

하나회 핵심으로 수도권 부대 사단장과 요직인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역임하며 동기생중 선두를 달려온 최소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인사참모부장으로는 처음으로 진급에 실패하고 교육사로 좌천된 뒤 기무사의 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었다.

청와대는 안기부가 올린 보고서에 극도로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전인 7월9일 최소장의 동기인 이충석(李忠錫)합참 작전부장이 문민정부의 군개혁을 비판한 이른바 ‘합참 회식사건’이 벌어져 여진이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기무사는 진상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한국통신과 전화국의 협조를 받아 최소장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국제전화 및 카폰을 포함한 모든 전화통화 내용을 일일이 체크했다.

조사 결과 최소장과 의심할 만한 전화통화를 한 현역장교는 두세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하나회 회원은 한명도 없었다. 최소장과 전화통화를 한 현역장교 중에는 기무사의 영관장교도 있었지만 쿠데타 모의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무사는 하와이 사무실의 존재와 하나회 회원의 해외활동을 확인하기 위해 문민정부 출범 이후 5개월 동안 하와이를 방문한 전현역 하나회 장성들의 움직임도 정밀 추적했다.

이 기간 중 하와이에 다녀온 하나회 출신 장성은 3명이었다. 그러나 모두 개인적인 일로 각각 다른 시기에 개별적으로 다녀왔고 문제의 사무실에는 들르지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기무사는 안기부의 보고내용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쿠데타 모의설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최소장은 93년10월 인사에서 사실상 전역대기 자리인 육본 정책위원으로 밀려났고 1년 뒤 군문을 떠났다.

최씨는 최근 “쿠데타설은 문민군부 신실세 그룹이 하나회를 치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며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육본 정책위원으로 있던 94년 여름 기무부대 장교가 나를 찾아와 안기부가 올린 정보보고서를 보여주더군요. 그는 나에게 ‘처음에는 장군님이 굉장히 나쁜 사람인줄 알았는데 직접 조사해보니 좋은 얘기만 들려 보고서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안기부에 있는 L장군이 만든 것’이라고 합디다.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었기에 보고서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 뒤 L장군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나에게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권영해(權寧海)장관이 배후인 것 같아요. 하나회 명단살포사건 때 내가 인사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헌병감실 대신 법무감실에서 조사해야 된다고 강하게 버텼거든요. 새 파워그룹 입장에서는 내가 하나회 제거의 걸림돌로 판단됐을 것입니다.”

쿠데타 모의설은 당시 군부내에서 일고 있던 문민정부의 숙군 방식에 대한 비판과 하나회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시에 잠재우는 계기가 됐다. 하나회로서는 마지막 입지를 잃은 셈이었다.

쿠데타 모의설 직전에 벌어진 합참회식사건은 93년 7월9일의 일. 이날 저녁 7시경 서울 성동구 옥수동의 대형갈비집 S가든. 이양호(李養鎬·전국방부장관)합참의장의 취임 한달을 맞아 합참의 소장급 이상 육해공군 장성 20여명의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그동안 업무보고를 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평소 술을 강권하지 않는 이의장은 “옆사람들과 잔을 주고받되 돌리지는 말자”고 제의한 뒤 장성들에게 소주 한잔씩을 권했다.

술자리가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던 저녁 8시30분경이었다. 갑자기 테이블 한쪽 끝에서 큰 소리가 나자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작전부장 이충석소장이었다.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

순간 이의장을 포함한 참석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소장은 내친 김에 할 말을 다하겠다는 듯 손으로 탁자를 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군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신에만 급급하고…. 군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어. 군이 이래도 되는 거야.”

참다 못한 편장원(片將圓)합참1차장과 하나회 선배인 김상준(金相駿)작전본부장이 “이장군, 조용히 해. 자리에 앉아”라고 제지했다.

당혹감이 좌중을 휩쌌지만 당시 군내에서는 하나회 숙정에 대해 쌓인 불만이 만만찮았던 때라 모두 그 정도에서 애써 끝내려 했다.

그러나 흥분한 이소장은 찻잔을 집어던졌고 회식자리는 엉망이 돼버렸다.

회식이 끝난 뒤 이소장은 동기생 등과 함께 2차로 방배동 H단란주점으로 갔다. 동기들은 “내일 의장에게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이의장도 기분이야 언짢았겠지만 특별히 이 사건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다음날 이소장이 사과하러 들어갔을 때도 나무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회식사건은 권장관에게 직보됐고 1주일만인 16일 이소장은 전격 해임돼 두달 뒤 전역했다. 권장관 등 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군개혁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 회식자리에 있었던 J예비역장군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을 군 개혁세력쪽에서 심각하게 문제삼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소장은 화끈하고 직선적인 성격입니다. 그와 술자리를 같이 해본 사람은 다 알지만 다소 빨리 취해 가끔 실수하는 것이 약점일 뿐이죠. 그날도 분위기가 뜨지 않자 이소장 혼자서 참석자 모두에게 돌아가며 술을 한잔씩 권했습니다.

그래도 옆사람끼리만 잔을 주고받고 별반 말도 없자 이소장이 다시 술을 한순배 돌렸습니다. 그러다가 불만이 폭발한거죠. 이소장은 사실 군개혁이 한창일 때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그러나 수뇌부는 개혁을 둘러싸고 내부에 반발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면 안되겠다고 판단했던 거죠.”

말하자면 합참회식사건은 다시 한번 하나회 제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증폭시킨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한바탕 숙정의 회오리가 지나간 뒤인 94년 10월25일 경북 영천의 제3사관학교에서는 교장 오형근(吳亨根)소장의 이임식이 열렸다.

그가 옮겨갈 보직은 1군 부사령관으로 사실상 전역대기나 마찬가지였다. 오소장은 생도들과 가족 외빈들 앞에서 원고도 없이 이임사를 시작했다.

“지금 군에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군수뇌부는 보호막 뒤에서 자신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부하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군은 무방비 상태로 매를 맞았습니다.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군이 과거에 무슨 큰 혜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국민이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군 스스로 목소리를 내 국민에게 실상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오소장의 이임사는 며칠 뒤 군수뇌부에 보고됐다. 처음에는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한달 뒤인 11월24일 언론에 오소장의 이임사가 보도되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국방부는 “계통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지 않고 피교육생인 초급장교들 앞에서 수뇌부를 겨냥한 것은 명백한 군기강 저해행위”라고 규정했다.

오소장은 곧 자진해서 전역했다.

문민정부의 하나회 숙정은 이처럼 계기와 명분을 적절히 이용하며 끈질기게 이뤄졌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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