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부형권/10분만에 끝난 「고문재판」

  • 입력 1998년 6월 12일 19시 46분


오랜 세월에 누렇게 색이 바랜 재판기록. 끝내 나타나지 않은 ‘고문기술자’. 단죄받을 장본인이 없는 공판은 10여분만에 싱겁게 끝났다.

빈 법정에 남은 건 고문피해자 가족의 눈물뿐이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60)씨 등 경찰관 16명에 대한 재정신청사건 공판이 열린 12일 서울고법 302호 법정.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박송하·朴松夏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는 현직 경찰관 6명만 참석해 신원과 연락처 확인 등 간단한 신문을 받고 돌아갔다.

‘소문난 재판’치고는 너무 간단했다.

그러나 재판부가 법정을 떠난 직후인 오전 11시5분경.

89년 12월 이후 불법체포 및 고문혐의로 수배돼 아직도 행적이 묘연한 이씨에 대한 ‘진짜 재판’이 열렸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소속 어머니 20여명이 일제히 ‘고문경찰’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내 딸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지금도 밥을 제대로 못 먹어요.”

“우리 아들은 짐승처럼 두들겨 맞아 남자 구실을 할 수 없게 됐단 말이오.”

강원도에서 새벽차를 타고 왔다는 한 할머니는 “고문 혐의가 있는 경찰관들을 왜 벌써 돌려 보내는 거야. 재판을 하긴 한거야”라며 법원 직원을 몰아세웠다. 이 직원은 “할머니. 오늘은 피신청인이 다 안나왔잖아요. 재정신청사건은 다른 형사사건과 달라요”라고 해명했지만 민가협 어머니들의 ‘한풀이 시위’는 수그러들줄 몰랐다.

이들은 저지하는 법원 직원들에게 “당신들은 민주화운동을 한 대가를 혹독한 고문으로 돌려받은 우리 자식들의 고통을 알기나 하느냐”며 고함을 질렀다.

서초동 법원청사를 가득 메운 이들의 한맺힌 절규는 한시간도 넘게 계속됐다.

〈부형권기자〉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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