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천재 이창호 ④]흑백돌과 유년기

  • 입력 1998년 6월 9일 07시 11분


말을 듣고 보니 영낙 없었다. 바둑판 건너편에 다시 앉는 꼬마의 볼에 흔적이 있다.

“아, 이 사람아, 너무했네 그려. 또 훌쩍이더만.”

진 바둑, 어느 한 판이 안타깝고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소년은 슬그머니 화장실을 찾아 눈물을 훔쳤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바둑선생’인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15년 전.초등학교 2년생 이창호(李昌鎬)와 열 달간 1천판 쯤의 바둑을 두었던 아마6단 이정옥씨(李廷玉·46·전주 평화바둑교실 지도사범)의 회고다.

어떤 판, 어떤 장면이 꼬마를 섧게 했을까는 가물가물하다. 하나 훌쩍거리더란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일었던 의혹만은 생생하다.

‘대체 이 놈이 어쩌자는 건가.’

이듬해 소년은 서울로 떠났고 몇 해 뒤 귀신같은 바둑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서야 그는 짐작했다. 소년의 눈물은 ‘큰 바둑’을 향해 던진 깊고 뜨겁고 맹렬한 ‘승부수’였음을.

이창호는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 바둑을 처음 배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치원 때 이미 바둑을 익히고 있었다는 것은 전주의 ‘바둑들’은 다 안다.

전주에서 활동중인 배일수(裵一洙·52)아마4단은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왔던 성신유치원생 이창호에게 4개월간 바둑의 기본 행마(行馬)를 가르쳤다.

“13점을 깔고 두었지요. 기초부터 가르친 셈이지요.”

배우는 속도가 빠르자 손자의 바둑에 이미 빠진 조부 이화춘씨는 ‘누가 바둑 좀 둔다’소리만 들리면 곧장 손주를 데리고 달려갔다. 초등학교 입학후 만난 ‘설기원’ 지도사범 이광필씨(현재 미국 거주중)도 그중 한 명. 여기서 1년여 시간이 흐르고 이미 바둑은 ‘본격수업’에 접어들고 있었다.

부친 이재룡씨가 할아버지 대신 ‘매니저’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년때인 83년 9월 이정옥사범을 찾을 무렵부터.

“처음 왔을 땐 7점 접었으니 아마추어 5급 정도지요. 성장속도는 엄청납니다. 다섯달 뒤 3점으로도 날 이기더니 다시 반 년이 지나자 맞두게 됐어요.”

묵묵히 바둑만 두고 복기(復碁)를 할 때도 그저 듣기만 했던 꼬마. 그렇지만 어른들도 ‘창호야’라 부르지 않았다. 동년배를 대하듯 ‘어이, 창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소년이 풍기는 수상쩍은 분위기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휴일도 없이 기원을 찾아 대국을 하고는 집에 돌아가 바둑공부에 집중했다.

부친 이재룡씨의 회고.

“하교후 기원에서 매일 3시간 정도 보냈을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둔 바둑을 복기하거나 정석책 혹은 신문 기보를 보며 다시 2, 3시간을 보냈지요.”

학교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었던 차라 아예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숙제 면제’를 요청했다.

이창호 집안은 바둑공부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정옥사범은 당시 매일 3판이상 두어주는 댓가로 공무원 월급정도를 받았다. 돈도 돈이었지만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고 이사범은 회고한다.

“한번 참패한 모양에 대해 따로 단단히 연구를 하는 게 분명했어요.”

크게 당한 뒤 일주일쯤 지나면 이창호는 지난번과 비숫한 모양을 유도해냈다. 선생을 상대로 ‘이번에도 해보실랑가요’ 당돌하게 대들었다.소리없는 연구업적 발표회였다.

그 무렵 꼬마 이창호의 바둑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패(覇)를 둘러싼 운영에 무척 강했다는 점.

바둑을 꽤나 둔다는 꼬마들도 대개 패에 대한 감각은 느슨하다. 포석 정석사활 수읽기 끝내기 등에는 어른못지 않게 치열하지만 패의 크기와 팻감을 헤아리는 일에는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창호는 이무렵 상대가 팻감을 쓰면 ‘0.1초’도 안돼 불청(不聽)하고 패를 해소하곤 했다. ‘미리 봐 둔 거야, 그냥 안받은 거야.’ 상대는 당황했다. 손을 뺀 곳에서 수를 내려해도 창호가 말(馬)을 수습하는 과정을 보면 그게 아니었다. 이미 확실한 계산서를 뽑아 놓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창호를 기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있었던 그대로의 창호’를 보여 달라고 한다. 서울에 올라가 프로기사들의 지도를 받기 이전 이창호가 자랐던 고향, 전주 아마바둑계가 얼마나 그를 아꼈는지 세상사람들이 조금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렇다. 재능을 발견하고 일찍부터 비싼 ‘수업료’를 아끼지 않고 선생을 찾아 헤맨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정신과 남몰래 흘렸던 소년의 눈물. 그것이 없는 ‘이창호 신화’란 천재를 갈망하는 세상사람들이 만들어낸 한낱 신화일 뿐, 진정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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