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33)

  • 입력 1998년 6월 3일 19시 34분


봉순이 언니는 서둘러 몸을 돌리다가 걱정이 되었는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는데, 마치 아이가 쥐고 있는 옷고름을 잘라놓고 밤도망치는 어미의 표정 같았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와 봉순이 언니가 없는 내 방의 문을 밀고 자리에 누웠다. 언니가 나를 목욕탕에 빠뜨린 것도 엄마에게 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봉순이 언니가 엄마에게 혼이 날까봐 그런 것이었다. 밤에 몰래 빠져나가 나를 무섭게 했어도, 봉순이 언니가 엄마의 화장품을 몰래 바르고 다시 손가락으로 통속의 화장품을 표시나지 않게 얇게 펴두는 것도 나는 이르지 않았었다. 그건 봉순이 언니와 나 사이의 약속이었고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이제 와서 치사하게 나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조금 울다가, 남은 울음을 턱에 끙끙 거리며 중얼거렸다.

―바보같은게 대한항공 비행기하고 김포공항 비행기하고 어떻게 다른지도 모르는 바보같은게…병식인지 하고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게… 식모주제에, 우리 집에 얹혀 사는 식모주제에….

나는 이제 아버지하고 노는 데 더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주었다는 아버지의 일제 도요타 크라운 차는 검고 반짝반짝했다. 아버지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운전기사에게 운전을 시켰지만 주말이면 손수 운전을 하고 우리들을 데리고 다녔다. 미국 유학 끝무렵 자동차를 팔면서 언제 다시 운전을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차마 키를 뽑기 힘들었다던 아버지는 이제 비참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더 악착스러워진 것 같다고 슬픈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머리에 기름을 발라 이마 뒤로 넘기고 내가 사달라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었다.

아버지는 서구적인 가장이 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 피아노를 들여놓고 나를 피아노 선생에게 보냈다. 그리고는 아침마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날 때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오원을 준다고 했다. 나는 그 오원을 벌기 위해 재미도 없는 피아노를 아침마다 두드려 댔고 아버지는 우리집에 피아노 소리가 울리는 것이 흐뭇한 듯 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제일 좋은 옷과 공단 리본이 달린 까만 구두를 신고 기다리고 있다가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오면 온 식구가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아버지가 미국에 있었을 때 저녁을 일찍 해 먹고 서부역 뒤 봉래극장에 괴기영화라도 보러가는 날이면 엄마는 물론 봉순이 언니까지 칠보단장을 하고 집을 나서던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처음에 아버지가 놀러가자는 말을 꺼냈을 때 봉순이 언니는 새옷을 갈아입으며 들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했다.

―너까지 가면 집 볼 사람이 없잖니?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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