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31)

  • 입력 1998년 6월 1일 20시 10분


―어어이!

잠시 후 나의 짐작대로 병식이라는 세탁소 총각이 나타났다. 단추를 세개나 풀어헤친 번쩍이는 주황색 셔츠를 입은 그는 허벅지가 꽉 달라붙는 검정바지를 골반에 걸쳐 입고 있었다. 언제나 봉순이 언니와 내가 그 세탁소 앞을 지날 때면 웃통을 벗고 근육이 솟은 몸으로 슈욱슈욱 김이 나는 다리미를 밀고 있다가 봉순이 언니와 눈이 마주치면 그 여드름 많은 멍게같은 얼굴로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 총각.

가까이서 보니 사람들이 왜 그를 말대가리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큰 머리의 뒤통수가 일자로 등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거드름을 피우며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봉순이 언니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봉순이 언니는 치마 호주머니에서 얼른 유엔표 성냥을 꺼내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잘 붙여야지, 머리카락이 탈 뻔 했잖아.

병식이라는 총각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언니의 머리를 쥐어 박았고 언니는 쥐어 박히고도 뭐가 좋은지 머리를 감싸쥐고 빨간 잇몸을 드러내며 히히 웃었다.

―웃기는, 망할 기집애가.

병식이 총각은 뱀처럼 찢어진 눈으로 나를 휘익 바라보더니 봉순이 언니를 따라 웃었다. 언니가 그 여드름 난 말대가리 세탁소 총각하고 밤마다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서 그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기가 막혔다. 그는 잘 생기지도 않았고 교양이 있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언니를 우리 엄마보다 더 부려먹는데 익숙한 것 같았다. 언니가 아무리 밥을 태우고 삶던 빨래를 눌려버려도 엄마는 한번도 봉순이 언니를 쥐어박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총각은 아무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언니를 쥐어 박았고 그래도 언니는 좋다고 히히 웃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사실은 세탁소 총각을 만나면 세탁소 유리창에 써 있던 세탁, 드라이, 짜깁기 중에서 짜깁기가 뭐하는 것인지 꼭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봉순이 언니의 손을 잡아 끌었다. 봉순이 언니가 내 손에 힘을 주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내가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언니의 눈길은 나를 이미 잊은 듯 애처롭게 세탁소 총각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갑자기 봉순이 언니를 따라 이 캄캄한 밤에 여기까지 따라나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어제는 어디 갔었던겨? 세탁소 주인아저씨가 일하구 있던데.

―임마, 사내 대장부가 세탁소 안에서만 갇혀 있어야 쓰겠냐? 수원에 댕겨왔지. 거기 이병식 말이라면 껍벅 죽는 후배들이 있잖냐 왜? 세탁소 총각은 수탉처럼 제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봉순이 언니는 그가 그렇게 많은 후배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말이 감동스러운 표정이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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