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29)

  • 입력 1998년 5월 30일 20시 02분


봉순이 언니는 하지만 네가 그래도 결국은 내 편인 걸 알아, 하는 표정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하얗게 햇볕이 튀어오르는 마당에 서 있었다. 무서움증이 또 몰려왔지만 봉순이 언니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린 마당에 무서워하는 것조차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철이 지난 오빠의 교과서를 폈다.

나는 어머니가 검은 철끈으로 묶어준 오빠의 종합장을 몰래 펴고 교과서의 글씨들을 베꼈다. 철수야, 이리 와 놀자, 영희야 어서 와 놀자.… 바둑아 이리 와 너도 놀자… 나는 한참 교과서를 베끼다가 연필을 부러뜨려버렸다. 심심했다. 심심했고 심심했고 심심해서 서러운 기분이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 가서 그것을 똥땅거리다가 쾅, 하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나는 빈집을 놓아두고 미자언니의 집으로 갔다. 미자언니는 내가 들어가자 이번에는 피우던 담배를 감추지도 않고 태연히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의식처럼, 마치 비밀의 화원의 입장권을 사는 것처럼 흰 연기를 입으로 모락모락 내뿜으며 담배를 다 피웠고, 미자언니는 주간지를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상대라도 만났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대한항공 비행기하고 김포공항 비행기하고 어떻게 다른 줄 아니?

비행기라면 그림책에서밖에 보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광주에서 오실 때 따로따로 온단다. 참 괴팍한 사람들이지. 할머니는 언제나 김포공항 비행기를 타고 할아버지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탄단다. 김포공항 비행기는 김포공항에서 타고 대한항공 비행기는 서소문에서 타는건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비행기라면 그저 김포공항 비행기밖에 모른다니까… 나는 둘 다 타 보았는데 역시 김포공항 비행기가 좋아… 탁 트인 벌판으로 날아오르는 게 아주 기분이 좋거든…. 대한항공 비행기는 답답해….

아버지가 한번 택시를 타고 시내 드라이브를 시켜주었을 때 서소문 고가도로 입구, 중림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갈라진 곳에 있었던, 커다란 비행기가 그려진 대한항공 간판을 떠올렸다. 아아, 거기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돌아올 때 김포공항 비행기를 탔다는 것 같았는데…. 정말 미자 언니는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봉순이 언니가 내게 해준 이야기들이 모두 시시하게 느껴졌다. 봉순이 언니는 비행기를 비향기라고 발음할 뿐만 아니라 생전 그걸 타본 일도 없을 터였다. 미자언니가 다시 말했다.

―너 여자랑 남자랑 만나서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 줄 아니?

―……

―남자가 말이야 여자의 거시기를 뚫어주는 거야. 그러면 막혔던 여자의 구멍이 뚫어지면서 그 곳으로 아이가 나오는 거란다.

미자언니는 집게손가락을 곧추세우고 어딘가를 찌르는 표시를 해보였다. 나는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인 줄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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