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이진영/『비온다고 밥 안먹나?』

  • 입력 1998년 5월 11일 19시 46분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바람까지 을씨년스럽던 11일 오전.

유영종(劉英鍾·74)씨는 이날도 변함없이 허름한 잠바를 걸치고 성북구 장위동 집을 나섰다.

“비가 와도 먹어야 살잖아. 이까짓 비때문에 안 나오면 누가 밥주나.”

오전 10시쯤 그가 찾아간 곳은 무료로 점심을 주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이미 5백여명의 노인들이 비를 피해 건물 처마 밑에 다닥다닥 모여 있었다. 이들은 해가 뜨자마자 공원을 찾아 급식표를 나눠주는 곳에 종이조각과 돌멩이로 급식 순서를 맡아둔 부지런한 축이었다. 처마밑을 채우고 남은 노인들은 공중전화 부스와 냄새나는 화장실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가 비를 피했다.

유씨처럼 늦게 나온 노인들은 쪼르르 자리를 잡아놓은 돌멩이 뒤쪽으로 직접 줄을 섰다.

동작구 사당동에서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고 이곳을 찾은 이경희(李敬熙·82)씨. 1시간여 줄을 서있더니 5월 비바람에도 손이 얼어 시퍼렇다.

“아침에 커피 한잔 타 마시고 오는 길이야. 예전엔 빵 두조각도 먹었는데 요즘엔 그것도 눈치가 보여….”

이씨 뒷줄에 서있던 ‘미세스 김’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다며 옆에 놓여 있는 축축한 벤치를 마다하지 않고 앉는다. 아는 것이 많고 영어가 유창한 인텔리 할머니다.

“상도동 빌라에서 살아. 아들은 중소기업 사장이고 딸은 부잣집에 시집가서 호주 시드니에 있지.”

할머니는 “푸어한(가난한) 집 딸을 며느리로 삼으니 구박을 더 하더라”며 풀이 죽어 말했다.

오전 11시반. 종로구청과 종교단체에서 급식표를 들고 나타나자 돌멩이 자리 주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돌멩이 주인과 직접 줄을 서있던 노인들간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탑골공원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6백여명의 노인들이 매일같이 겪는 일이다.

〈이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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