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에밀리」,시인과 소녀 초롱꽃같이 고운 우정

  • 입력 1998년 4월 14일 08시 09분


마이클 베라드 글·바바라 쿠니 그림(비룡소 펴냄)

우리 거리에, ‘신비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아주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길 건너편 노란집에 살아요.

그 아주머니는 거의 20년 동안 자기 집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기라고 하면, 그분은 달려가서 숨어버려요. 어떤 사람들은 그 아주머니를 미쳤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에밀리랍니다….

우리가 이사온지 얼마 안된 어느날,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엄마가 편지를 뜯자, 피아노 건반 위로 조그만 꽃이 떨어졌습니다. 납작하게 말린 초롱꽃이었어요.

“이웃에 사시는 분께.” 엄마가 편지를 읽었습니다. “저는 마치 이 꽃과도 같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저를 소생시켜 주세요. 그 음악이 저에게 봄을 가져다줄 거예요….”

나는 그 초롱꽃을 내 방 창턱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백합 알뿌리들이 담긴 상자 옆에요. 그것들은 우리가 고향에서 가져온 것인데, 겨울 내내 춥고 어두운 지하실에 있었어요. 아빠는 그 속에 새 생명이 숨쉬고 있대요. 그래서 봄에 땅에 심으면, 햇빛을 받고 비를 맞아 자라기 시작할 거래요.

다음날 아침, 집 안은 온통 음악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꽃에 물을 주며 아빠하고 온실에 있었습니다. 햇빛이 내 얼굴 위로 따스하게 내리쬐었어요.

“아빤 그 아주머니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세요?”

“노란집의 숙녀말이냐? 때로는 그렇겠지. 우린 모두 다 이따금씩 외롭단다. 하지만 그분도 우리처럼 꽃을 가꾸고 있고, 또 시를 쓴다더구나.”

“시가 뭐예요?”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들어보렴. 엄마는 한 작품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데, 가끔은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음악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게 몸을 오싹하게 만들지. 그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야. 그런 일을 말과 글이 할 때,그걸 시라고 한단다.”

다음날 아침, 정원의 눈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지빠귀 한 마리가 어느새 파릇해진 잔디에 내려앉았습니다. 그것은 봄이 오는 신호였어요.

나는 창턱 위의 초롱꽃 선물을 바라보았습니다. 노란집에 갈 때 어떤 선물을 가져가면 좋을까….

비룡소에서 펴낸 ‘에밀리’. 19세기 미국의 매사추세츠 암허스트에서 은둔했던 시인 에밀리 디킨슨과 한 소녀의 따뜻한 우정을 그렸다.

바바라 쿠니의 섬세한 그림과 마이클 베다드의 아름다운 글. 그 속에 한 아이가 점점 눈을 뜨게 되는 삶의 신비와 어른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시의 세계가 영롱하게 수놓아진다.

디킨슨은 결혼한 적도 없고 고향을 떠난 적도 없다고 한다. 생애의 마지막 25년은 집안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그녀는 일생 동안 시를 썼다. 때로는 작은 종이 위에 쓰기도 하고, 손에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다 시를 썼다. 그녀가 생을 마쳤을 때 그녀의 방 안 벚나무 책상에서 1천8백편의 시가 발견됐다.

마침내 노란집을 방문한 소녀. 엄마가 연주를 하는 동안,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와 ‘신비의 여인’과 만난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내 심장이 마치 작은 새의 심장처럼 빠르게 뛰었습니다. 나는 층계 꼭대기에서 발을 멈췄습니다. 거기에는 온통 새하얀 여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은 조그만 의자에 앉아서, 무릎 위에 놓인 종이 위에 뭔가 쓰고 있었습니다.

“장난꾸러기 꼬마야.” 그분이 말했습니다.

“이리 오렴.” 나는 그분 옆에 섰습니다. 우리 옷은 둘 다 눈처럼 하얀색이었어요. 나는 그분의 무릎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게 시예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시는 바로 너란다. 이건 시가 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야.” 창턱 위에 놓아둔 초롱꽃처럼 그분의 목소리는 가볍고도 예민했습니다.

“아주머니께 봄을 좀 가져왔어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백합 알뿌리 두 개를 꺼내 그분의 무릎에 내려놓았습니다. “땅에 심으면 백합꽃으로 변할 거예요.”

“어머나, 예뻐라. 그럼 나도 너에게 뭔가를 줘야겠구나.”

그분의 연필이 무릎 위에 놓인 종이 위를 가로지르며 급히 움직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엄마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분은 그 종이를 접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자, 이걸 숨겨 두렴. 나도 네가 준 선물을 숨겨 둘 거야. 아마 머지않아 둘 다 꽃이 필 게다….”

곧 봄이 왔습니다. 하루는 내가 내 방 창 아래에다 백합 알뿌리를 심는 걸 아빠가 도와주었습니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백합 알뿌리가 좀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높은 울타리 너머 자기 정원에서 내가 준 선물을 숨기고 있을 그분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곧 햇빛을 받고 비를 맞아 백합이 자라기 시작할 거예요. 새싹들이 흙에서 돋아나고, 그 다음엔 백합꽃이 온통 새하얗게 피겠지요. 정말 신비스러운 일이지요.

너무나도 많고 많은 일들이 신비스러워요….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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