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②]미국식 경영모델

  • 입력 1998년 4월 2일 20시 02분


한때 세계인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에스페란토어를 세계 공용어로 쓰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계 공용어는 에스페란토어가 아니라 영어다. 마찬가지로 세계 시장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고 팔 때 사용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아메리칸 스탠더드’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정치상품을 만들어내는 워싱턴, 영화의 도시 할리우드, 금융의 메카 월스트리트, 첨단 정보산업의 실리콘밸리, 자동차 왕국 디트로이트에서 통하는 ‘로컬 스탠더드’는 그대로 세계 각국이 따라야 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고 있다.

영어가 에스페란토어보다 배우기 쉽고 보편적이어서 공용어가 된 것이 아니듯 미국의 표준이 반드시 우수해서만은 아니다.

전문가들의 똑같은 목소리다. “이것은 엄연한 힘의 논리다.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돈많은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소득 재분배를 강조하는 유럽의 자본주의는 70년대에 이미 힘을 잃었다.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연간 10%대의 성장률을 기록하던 정부주도형 아시아의 발전모델도 금융대란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90년대의 강자는 단연 ‘일한 사람만 먹자’는 식의 냉정한 얼굴을 한 미국식 경영모델이다.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는 ‘이제 우리식으로는 안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산다’는 명목으로 ‘미국 따라 배우기’가 한창이다.

지난해 일본 최대의 PC 생산업체인 NEC는 82년부터 생산해 일본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막강한 세력의 ‘98시리즈’ 생산중단을 돌연 선언해 일본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유는 미국의 IBM이나 매킨토시와 호환성이 없어 IBM 호환모델과 더이상 경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전자업체 후지쓰(富士通)는 최근 대형 제조업체로는 처음으로 연공서열식 임금과 인사제도를 폐지, 10월부터 직무 실적에 따라 임금과 승진여부를 결정하는 성과주의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연공서열제는 종신고용제 및 기업별 노조와 함께 한때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가져온 3대 신기(神器)였다. 이를 바꾼다는 것은 일본적 경영방식의 포기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유럽의 강국 독일의 ‘미국 따라하기’는 일본보다 10년 앞서 진행됐다.‘총리 헬무트 콜’보다는 ‘독터(박사) 헬무트 콜’이라고 불리길 선호할 정도로 독일은 학력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는 학벌이고 뭐고 철저하게 일의 성과만을 따지는 성과주의 인사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인 획스트는 서슴없이 “미국형 경영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고 입고 보는 문화를 따져보면 ‘아메리칸 스탠더드의 글로벌화’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전세계 영화 제작자들이 따르는 영화의 공식은 할리우드에서 수년간 갈고 다듬어진 스타일. 세계 각국에서 매년 상영되는 영화의 70∼99%가 할리우드 영화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보편적 상품인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상품 중에서도 가장 미국적이라는 것. 내세울 만한 역사가 없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인들은 장구한 역사에 따라다니는 고급문화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 대신 자유롭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미국문화를 대표하는 코카콜라는 이제 전세계 청량음료 시장의 절반을 차지해 전세계인의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로 자리잡았다. 1백12년전 존 펨버튼 박사가 자기 약국에서 만들어 팔던 5센트짜리 소다수 음료 코카콜라는 전세계에서 초당 1만4백50잔이 팔린다.

지금까지의 빈병을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2천30번도 넘게 왕복할 수 있다는 글로벌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세계를 피로 물들인 이념의 장벽까지 흔들어가며 세계 곳곳에 빅맥 친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가장 미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될 수 있는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영화평론가 강한섭(康漢燮·서울예전)교수의 진단.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용광로다. 이런 데서 싸우며 뛰다보니 이질적인 사람들 모두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뽑아내는 데는 선수가 된 것이다. 자기네 프로야구 결승전을 주저하지 않고 ‘월드 시리즈’라고 이름붙이는 자신감은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이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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