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밀레니엄]과학자-작가가 내다본 21세기

  • 입력 1998년 3월 31일 20시 20분


《‘지속가능한 개발’ ‘저소비형사회’를 인류사회 미래대안으로 제시하는 화학자 김명자교수와 21세기에 인간수명은 얼마나 늘어날까를 궁금해하는 작가 성석제가 만났다. 진시황 이래 불변의 소망인 ‘장수’. 21세기에는 평균수명 ‘1백세’가 실현될까.

그러나 김교수는 유전공학 등에 힘입어 생명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일이 생태계에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지 염려한다. 오래 살아남은 인간만이 행복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2060년7월5일 내 백번째 생일이다. 백번째 생일이라면 꼭 내가 아니라도, 사람이 아니라 개나 사이보그라도 기념을 해줄 만도 하건만 내게는 기념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선물도 없고 생일 축하 노래도, 소원을 빌고 불어 끌 촛불도 없다. 식구들과 함께 미역국을 먹던 지난 세기의 아기자기한 생일풍경이 그립다.

지난 세기말에 환갑을 건너뛰던 사람들처럼 요즘은 백수잔치를 건너뛰고 부부끼리 달여행을 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함께 여행을 갈 만한 사람이 없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재작년에 들어온 혼담을 거절하지 말 걸 그랬다.

우리 세대가 평균 수명 백세를 바라보는 첫번째 세대이다 보니 선구자로서 험한 꼴을 많이 겪는 것 같다. 21세기 초반에 ‘최적 숫자의 인간이 최대의 행복과 진보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최적 숫자의 기준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전지구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이렇다.

현존하는 모든 성인 남녀가 아이를 하나씩만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계산에 따르면 2000년대가 막 시작됐을 때 처음 25년간의 출생수는 2천만명이지만 2200년에 이르면 7백만명으로 급감한다.

기왕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식과 후손에 대해 큰 죄책감없이 수명을 연장하는 논리적인 방패가 됐다.

그 다음에는 ‘기왕 태어난 것 백살까지 살자’라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선두에 섰던 정치가 과학자 자연련(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식만 먹고 자연치료만 하고 자연만 보호하고 자연공부만 하다가 자연사하자는 운동연합)친구들. 허허 다 어디로 갔는지 죽어라 하고 운동만 하다 자신은 백살을 못 채운 친구들이 태반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운동의 순수함이 과격함을 초래했고 대립과 전쟁을 낳았다. 그 결과 평균 수명은 오히려 떨어지고 말았다.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자신이 아니면 지구의 자전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정치가, 상속세를 극도로 싫어하는 부호들, 과학만능주의 과학자, 기술전체주의 기술자 등등―로 이루어진 비밀결사에서 수명을 연장하는 전래의 갖가지 비방과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장수의 비결’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걸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들이 세계 각국에서 무작위로 고른 피실험자 명단에 내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같은 평범한 시민을 비밀스러운 장소에 납치해 억류하고는 산화(酸化)유리기의 활동을 억제하는 항산화효소, 노화방지 호르몬, 유해유전자억제 리보솜을 마구잡이로 투여했다.

무수한 피실험자들이 부작용으로 죽거나 죽는 게 나을 듯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걸 운이라고 하는지도 모르지. 나는 보존가치가 있는 마루타로 얼떨결에 생존하게 됐다.

나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납치 감금 고문과 살인혐의로 체포돼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았다.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대로 백살이 넘어 죽었는지 조금 궁금하다. 그들의 실험은 불법적이었지만 의미있는 데이터도 있었다. 그 데이터가 공개되면서 평균수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사람들은 백살 전에 질병이나 노화로 죽는 것을 과거에 교통사고로 죽는 것처럼 재수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세기말에 착수한 인체게놈계획의 성공 덕분에 공산품 품질 개량하듯 사람 몸의 고장을 미리 손보게 됐기 때문에 치매 걱정도 별게 아닌 세상이 됐다.

지금도 나는 하루종일 관찰당한다. ‘진시황 프로젝트’라는 사회개발계획을 통해 장수천국을 이루려는 정부가 평균수명 백세를 넘기는 첫 세대의 표본으로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 데이터를 일반화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사로봇이 정하고 요리하고 배달해준 메뉴에 따라 식사를 한다. 그 로봇은 내가 일년 전에 고구마를 먹고 방귀뀐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내 취향에 맞게 편집된 뉴스를 본다. 요즘 특기할 만한 뉴스는 한반도 전역의 공원화율이 98.45퍼센트에서 98.43퍼센트로 낮아지는 바람에 30여년전에 유전공학의 힘으로 되살린 공룡 브론토사우루스 알의 자연부화율이 0.3퍼센트 저하되었다는 것인데 이 뉴스를 전하는 기자는 그게 뭐 그렇게 안타까운 일이라고 목을 껄떡대며 눈물을 흘려댔다.

이렇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인생을 덤으로 살아주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내 친구들은 거의 백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버렸고 이상스럽게 편해진 세상에서 나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비유하자면 나는 거지가 된 왕자가 아니라 왕자가 된 거지다.

사람들은 내가 인간의 자연수명으로 알려진 1백20세는 물론이고 2백, 3백, 5백세도 너끈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부러워한다.

출생 이후에는 분열을 멈추고 서서히 파괴돼 가는 뇌세포문제만 해결한다면…. 들리는 말로는 그 문제도 이미 거의 해결이 돼 자원자를 대상으로 실험이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그 따위 실험에 자원할 생각이 전혀 없다.

참 오늘은 나의 백번째 생일이다. 촛불은 없지만 소원을 말해볼까. 오오, 나는 내 식으로 죽고 싶다.

[과학자-작가 약력]

▼ 과학자 김명자 ▼

△44년 서울 출생 △66년 서울대 졸 △71년 미국 버지니아대 박사 △현 숙명여대 화학과교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및 경실련 환경개발연구센터 위원, △저서 ‘현대산업사회와 환경문제’ ‘기술정보화시대의 인간문제’, 역서 ‘앞으로 50년’ 등

▼ 작가 성석제 ▼

△60년 경북 상주 출생 △86년 연세대 법학과 졸 △86년 ‘문학사상’으로 데뷔 △창작집 ‘재미나는 인생’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장편‘궁전의 새’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