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고흥문 前국회부의장

  • 입력 1998년 3월 16일 07시 38분


15일 타계한 고흥문(高興門)전국회부의장은 변절을 싫어하며 야당 외길을 걸어온 원로정치인이었다.

‘흥문’이라는 이름은 태몽에 동대문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동대문에 걸려 있는 현판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처음과 끝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아호는 인지(仁之). 이 역시 ‘흥인지문’의 가운데 글자로 만들었다. 41년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협신상사 지배인, 대표이사부사장으로 사업에 전념하던 고인이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50년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박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조박사 밑에서 민주당 재정을 담당하던 고인은 야당에서만 5선의원이 되는 동안 줄곧 ‘유진산계(柳珍山系)’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역시 민주당 구파(舊派)로 ‘진산계’의 핵심이었던 김영삼(金泳三) 이철승(李哲承)씨와의 정치적 관계도 여기서 시작됐다.

70년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때 고인이 막전막후(幕前幕後)에서 열심히 김영삼후보를 지지한 것도 그같은 인연때문이었다. 당시 고인은 김영삼 김대중(金大中) 이철승 세 사람의 ‘40대 기수론’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진산을 설득하기 위해 진산의 서울 상도동집을 열여덟번이나 오르내렸다고 생전에 회고했다.

자신의 사무실이 있던 서울 남대문의 그랜드호텔 이름을 따 ‘그랜드계(系)’라는 독자계보까지 이끈 고인은 90년에 펴낸 ‘정치현장 40년―못다 이룬 민주의 꿈’이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정치생애를 이렇게 정리했다.

‘60년 2월 유석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서(急逝)한 이후 나의 정치생활은 해위 윤보선(海葦 尹潽善), 진산, 그리고 40대 기수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점철됐다.’

유신말기인 79년 야당몫의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고인은 80년 ‘서울의 봄’때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의 합작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축출당하자 미련없이 정치일선을 떠났다.

이후는 ‘장외(場外)정치’의 세월이었다. 민한당 신민당 통일민주당 등 야당에서 끈질기게 영입교섭을 했지만 ‘통합야당’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고 6공의 요직제의도 물리치며 야인(野人)을 고집했다.

〈김창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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