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조광조]원칙 충실「개혁의 화신」

입력 1997-09-20 07:10수정 2009-09-2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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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 개혁사상가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 당시 사람들은 그를 두고 「광자(狂者)」 「화태(禍胎)」라 불렀다. 미친 사람, 화를 낳는 사람이란 뜻이다. 원칙에 철저하고 앎과 행함을 일치시키려했던 그가 이렇게 불렸다는 사실은 아마 그때도 지금처럼 매끄러운 선비가 날리고 요령이 판치는 세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곧고 용기있는 삶」이 오히려 화를 가져오는 미친 짓으로 왜곡됐기 때문이리라. 조광조가 개혁의 이상을 펼쳤던 중종 전반, 16세기 초반은 한국사에서 조선 전기와 중기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로 이해돼왔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시기구분의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했으며 그만큼 변화가 많았다는 의미다. 조선 중기 새로이 등장하는 정치세력인 사림(士林)은 집권세력인 훈척(勳戚)의 비리와 부도덕성을 비판하고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에 신음해야했던 당시 상황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들은 연산군대 사화(士禍)로 인한 피해에도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고 개혁의지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1515년, 드디어 조광조 등 기묘사림의 중심 인물들은 삼사(三司)를 비롯한 요직에 두루 포진, 본격적인 개혁 추진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이상주의자 윈칙주의자였다. 17세때 평안북도로 귀양가 있던 김굉필(金宏弼)을 찾아가 성리학을 배운 그는 이 사상이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새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이념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평소 생활에서도 성리학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는데 「미친 사람」 「화를 낳는 사람」으로 불린 것도 이 원칙주의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실천주의자였다. 성리학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요순 삼대(堯舜 三代)」의 정치만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관직에 나아가자마자 그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정(司正)의 최고 책임자인 사헌부 대사헌에 오르자 개혁의 강도를 한단계 높였다. 그는 사회모순 심화의 근본 원인이 사장(詞章)을 중시하고 도학(道學)을 경시하는 학문풍토, 예의 염치를 잃어버리고 이욕에 빠져드는 사회풍토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같은 잘못된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하며 성현을 본받고 왕도정치를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국가의 실현은 국왕 스스로가 현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그에 못지않게 국왕을 올바르게 보좌할 수 있는 신하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왕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의하는 일)과 언론활동의 강화, 추천에 의해 인재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 소격서(昭格署·도교의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의 혁파, 소학(小學)실천운동과 향약보급운동 등 사회 각부문에 걸친 개혁작업을 동료들과 함께 추진해갔다. 이렇듯 개혁이 점차 뿌리를 내려가자 이들은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장했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때 책봉된 공신들 중 하자가 있는 76명의 공신 명단 삭제를 주장한 것으로 훈척의 집권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의 혁명적인 개혁이었다. 이는 훈척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중종의 사림에 대한 견제 심리까지 더하여 결국 이 조치가 단행된 지 4일만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후대에 이황(李滉) 이이(李珥)는 조광조에 대해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부족한 상태에서 정치 일선에 나가 개혁을 급진적으로 추진하다 결국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상이 이론적 깊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도덕성과 수신(修身)의 강조, 성리학 이념의 사회적 실천 등은 새 시대에 대한 방향을 체계적으로 명확히 제시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실천적 행동은 훈척까지도 성리학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하고 성리학을 자기 시대의 지배 이념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38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지 꼭 50년만인 1568년(선조1년) 조광조는 그가 제시한 방향을 충실히 따른 후배 사림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음으로써 다시 역사에 복권됐다. 비록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개혁이 실패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할 바를 알게되고 나라의 다스림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610년(광해군2년)에는 도학을 중흥시켰다는 공로로 스승인 김굉필등과 함께 학자의 최고영예인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룩하려고했던 개혁의 이상도 역시 후세 사림들에 의해 상당부분 실현되었으며 조선 중후기 내내 그는 가장 이상적인 선비상으로 추앙받았다.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그의 개혁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공한 것이다. 역사 발전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대안 제시, 개혁의지와 원칙 준수, 그리고 자기 희생 등 그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지금 개혁으로 나라를 이끈다고 부산을 떠는 사람들은 이러한 덕목 가운데 몇개나 갖추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고영진<광주대 교수> ▼ 약력 ▼ △광주대 교수(국사학)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저서 「조선 중기 예학사상사」 「역사 속의 역사읽기1, 2, 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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