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길/헨티아이막]『영웅의 후예는 살아있다』

  • 입력 1997년 8월 4일 10시 10분


칭기즈칸의 탄생지 델리운 볼닥은 광활한 초원으로 뻗은 자동차길만 따라가면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6백㎞가 채 안된다. 울란바토르에서 동남쪽으로 2백30㎞쯤 달려 투브아이막(아이막은 우리의 도)을 막 벗어나면 아득한 옛날부터 몽골땅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거의 다 목격한 헤를렝강(1,090㎞)이 나온다. 그 강을 건너면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솜은 우리의 군) 오스틴 덴지다. 93년7월 손보기교수가 이끄는 한몽공동학술조사단은 다리 건너 5㎞북쪽 오스틴 암(동경108도29분, 북위47도44분)의 네모진 무덤들 가운데 하나를 발굴했다. 2천3백년전(±70년) 전장에서 허리가 잘려죽은 키 1백60㎝ 되는 스물 안팎의 남자와 포로로 잡혀와 산채로 묻힌 것으로 보이는 1백70㎝쯤 되는 마흔 안팎의 건장한 남자의 유골, 함께 묻은 청동 화살촉 등을 찾아내 네모진 무덤의 연대가 청동기시대라는 것을 확정지었다. 칭기즈칸의 고향 헨티아이막은 크고 작은 나아담(축제)에서 우승하는 명마들로 이름난 고장이다. 몽골의 말달리기 시합은 트랙을 따라 1∼2㎞를 뛰는 정착국가의 경마와는 달리 초원길 10∼25㎞를 달려 승부를 가린다. 출전마들은 두살 미만, 세살 미만, 네살 미만, 다섯살 미만, 여섯살 이상, 종마로 분류된다. 96년7월11∼12일 몽골 수립 7백90주년과 인민혁명 75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나아담에서 11.25㎞를 뛴 1∼2살배기 4백마리 가운데서는 헨티아이막 쳉케르만달솜의 도가르 수렝의 회색 망아지가 우승했다. 24.6㎞를 뛴 종마 6백30마리 가운데서도 울란바토르 사업가 바트후가 헨티아이막 바얀호탁솜 담단잡에게서 사들인 옅은 갈색말이 33분28초만에 반환점을 돌아와 우승했다. 몽골의 말은 사람으로 치면 마라톤선수 겸 역도선수다. 이렇게 힘세고 참을성 있는 몽골말이 있었기에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도 가능했을 것이다. 몽골에는 직업기수가 따로 없기 때문에 말달리기 대회의 선수는 대개 10세 전후의 아이들이다. 말은 기수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쳐 달리며 반환점을 돌고나면 숨이차서 죽기도 한다. 죽은 말의 어린 기수가 애통해 하는 모습은 마치 동생을 잃고 슬퍼하는 어린 누나처럼 애처롭다. 예로부터 헨티아이막은 유명한 장사 역사들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96년 전국 나아담의 씨름에서 우승한 바트에르덴도 헨티아이막 사람이다. 전국 나아담에서 씨름은 5백12명의 장사가 출전, 토너먼트 방식으로 단판 승부로 겨룬다. 그래서 2백56명→1백28명→64명→32명 하는 식으로 사람이 줄다가 맨 마지막에 2명이 남아 승부를 가리며 여기서 이기면 전국최고 장사로서 고향 박물관에는 늠름한 모습의 전신그림이 영구전시된다. 몽골 씨름꾼들도 체격이 크고 힘이 세지만 배는 거의 나오지 않아 8백여년전 칭기즈칸의 용사들이 저랬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런 체격은 경기방식과 관련있는 것 같다. 몽골 씨름은 샅바없이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시작되며 체급도 없다. 경기장이 큰 것은 축구장만해 금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며 승부와도 관계가 없다. 힘이 셀 뿐 아니라 몸놀림도 빨라야 상대방에게 공격기술을 걸어볼 수 있다. 96년 나아담에서 결승전은 4시간이 지나서야 승부가 났다.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창업은 이렇게 참을성 많은 몽골의 용사들과 함께 이루어 낸 것이었다. 칭기즈칸의 아우 카사르와 카사르의 아들 이숭게는 모두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숭게는 1225년 보카 소치카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시합에서 5백36m를 쏘아 우승했다고 하니 그때는 멀리쏘기로 겨루었던 듯하다. 당시 몽골 병사가 휴대했던 평균적인 활도 70㎏정도의 힘으로 끌어당겨 화살이 1백80m를 날아가도록 제작됐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몽골병들의 활과 화살은 적 병사 개개인을 명중시키는 것보다는 소부대 기동을 제압하는데 주안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즈음 나아담에서는 여자부는 56m, 남자부는 72m거리의 과녁을 한번에 4발씩 9회를 쏘아 쓰러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다. 96년 전국 나아담에서 남자부 우승자는 34발을, 여자부 우승자는 32발을, 며칠뒤 국회의장이 된 곤칙도르지 의원은 4발을 쏘아 3발, 오치르바트 당시대통령도 한발을 명중시켰다. 테무친이 태어난 델리운 볼닥이라고 주장되는 곳은 대략 예닐곱이나 된다. 그러나 헨티아이막 운드르항에서 북으로 2백60㎞를 달려 다달솜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5㎞쯤 더 가면 오농강과 발지강 사이에 자리한 소의 지라 모양을 한 야트막한 소나무 동산에 다다른다. 그 곳이 절대다수의 전공학자들과 몽골인들이 칭기즈칸의 탄생지로 지목하는 「몽골비사」의 델리운 볼닥이다. 다만 몽골과학아카데미와 일본 요미우리신문사가 장기간의 현지조사 끝에 94년 일본에서 낸 공동보고서에는 빈데르솜 소재지에서 멀지 않은 람이잉 옥하(동경110도38분, 북위48도35분)가 델리운 볼닥으로 올라 있다. 오랜 서하(西夏)원정을 마치고 귀환에 오른 칭기즈칸은 1227년 음력7월12일 오늘의 중국땅 감숙성(甘肅省) 청수현(淸水縣)의 육반산(六盤山)에서 66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 무덤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지만 헨티아이막 어디쯤이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유원수 (한국외국어대 연구원) ▼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여성 김선정씨 ▼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 간단사(寺). 몽골 불교(라마교)의 최대사원인 이곳에 몽골스님과 결혼한 한국인 여자가 산다. 간단사 승가대 미술과장 푸루밧 스님(34)의 부인 金宣靜(김선정·36)씨. 김씨도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김씨는 지난 89년 불교미술의 원류인 밀교미술을 배우기 위해 티베트로 갔다. 그후 달라이라마가 망명해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푸루밧 스님을 만났고 94년에 몽골로 함께 이주, 간단사 승가대에 미술대를 설립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앙크하나(4)도 태어났다. 『몽골문화는 불교문화입니다. 티베트미술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고 아름다우며 특히 자나바자르의 작품들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어떤 작품들보다 인체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간단사 미술대 불교문화원에는 이들 부부와 45명의 학승들이 만든 대형 입체만다라를 비롯, 가축에 찍는 낙인(탐가) 등 전통문양을 복원한 작품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이들은 이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교과서(18권)로 편찬하고 티베트어로 돼 있는 미술관련 경전 56권을 현대 몽골어로 번역할 계획이다. 〈울란바토르〓전승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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