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60)

  • 입력 1997년 3월 6일 08시 14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15〉 그 다음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시간을 놓치면 그는 식사를 할 데가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는 마음 편히 따로 밖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어떤 땐 함께 더 있고 싶어도 그런 그를 위해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고 말할 때가 많았다. 아직은 그것이 그에 대한 배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제 전철 역 앞에서 오토바이가 멈춰섰을 때에도 그랬다. 먼저 본 남자의 자동차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음 같아선 그녀가 먼저 새 오토바이 이야길 꺼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저녁값이거나 커피값 같은 것은 그에게 크게 표내지 않고 그녀가 도맡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아직 그에게 배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배려로 서울 거리에서 두 남녀가 이 거리 저 거리를 지치지도 않고 걸어다니다가 여섯시만 되면 한끼의 밥을 위해 헤어지곤 했던 것이다. 중간에 몇 번 밖에서 함께 자장면을 먹거나 설렁탕 같은 것을 먹은 적이 있긴 하지만 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두 사람은 서로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 또 어제처럼 식사 시간을 완전히 놓치고 난 다음에도 따로 음식점 같은 데 들르지 않고 바로 헤어질 때도 많았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녀가 아픈 것이 매일 늦게 다녀서라고 말했다. 일학년 때나 이학년 때보다 귀가 시간이 늦은 건 사실이지만 그때는 그녀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서울에 없었을 때였다. 지난 일학기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저씨를 찾아 신문사로 갔던 날 몇 번 그렇게 늦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학과 친구들과 연극 구경을 가거나 영화 구경을 갈 때 미리 집에 연락을 하고 늦었던 일 몇 번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늦게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가 아무 때나 밥을 챙겨 먹을 수 있거나, 밖에서 밥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조금은 풍족한 가정의 아들이라면 그녀의 귀가 시간은 지금보다 늘 늦었을 테고, 또 엄마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도 크게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뭘 늦게 다닌다고 그래요?』 그녀는 아픈 목으로 엄마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그런 딸을 보며 엄마는 이 애가 정말 몸이 아픈가 보네, 하는 얼굴을 했지만 그녀는 아픈 것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짜증을 냈던 게 아니었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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