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령기자] 「고노레티아, 지키이아, 엑스트멩, 바닐…」.
발음하기에도 듣기에도 낯설기 짝이 없는 단어들. 그러나 결코 암호는 아니다. 90년대 미국 시카고의 한 학교 학생들 이름일 뿐이다.
「톰」이나 「딕」이 흔한 이름이던 미국사회에 이런 이름들이 등장한 것은 그만큼 수많은 갈래의 민족들이 미국땅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들은 20세기 초반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미국땅으로 이민왔던 선배들과는 달리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담은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달 미국에서 출간된 신간 「이름의언어학(The Language Of Names)」은 작명에 얽힌 일화와 이름의 변천사를 통해 미국사회의 가치관변화를 조망했다. 인터넷서점아마존(http://www.amazon.com)과 뉴욕타임스가 「볼만한 신간」으로 추천한 이 책은 전기작가인 저스틴 카플란과 여성소설가 앤 베르네이 부부의 공저. 아내인 베르네이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이름에 관한 미국사회의 가치관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들은 이름에 얽힌 수많은 일화를 통해 사회의식의 변화를 역추적한다. 저자들이 20세기 성명학의 대가로 꼽은 것은 「할리우드」. 할리우드는 마리온 마이클 모리슨, 노르마 진이라는 진부한 이름의 풋내기 배우들에게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은 존 웨인, 마릴린 먼로라는 예명을 붙여줌으로써 출세길을 열어주었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는 유태인들의 「창씨개명」이 줄을 이었다. 비록 히틀러치하인 유럽에서처럼 핍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유태계 미국인들도 이름속에서 자신들의 출신성분을 숨기지 않는 한 좋은 직장을 얻거나 사회적으로 출세하는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회적인 개념의 단어들도 시대를 거치며 변화됐다. 69년 예일대에 입학한 흑인 헨리 루이스 게이트 주니어의 신랄한 입학소감은 그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내 할아버지는 「컬러드(Colored)」, 아버지는 「니그로(Negro)」로 불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블랙(Black)」으로 불린다』 게이트의 아들이 있었다면 여기에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보탰을 것이다.
이름에 관한 사회적 분쟁은 이제 민족감정이나 한 집안의 명예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개인의 배타적인 지적재산권의 문제로 변모됐다. 저자 베르네이가 소설속에 무심코 쓴 실명(實名)때문에 막대한 배상금을 치러야했던 일화는 이를 확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