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11)

  • 입력 1997년 1월 11일 19시 55분


첫사랑〈11〉 아직 얼굴을 모르는 아저씨께. 쓴다면 그 편지의 첫줄은 그렇게 시작해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한 줄을 쓰고 나선 어떤 말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얼굴 모르는 아저씨이긴 하지만 그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매년 겨울방학이 다가오면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국군 장병 아저씨께」 쓰는 위문 편지와는 다른 무엇이니까요. 밤새 편지지를 잡고 끙끙거리다 새벽에야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지난 이태 반 동안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아저씨의 기사를 읽고, 그것을 한 장 한 장 모아 스크랩하며 어쩌면 이런 모습 또한 비극적이고도 정열적인 사랑일지 몰라 하고 가만히 아저씨의 이름을 가슴에 담던 날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편지였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깊은 밤 이 편지를 쓰는 제 이름은 채서영입니다. 매주 화요일마다 아저씨가 쓰신 「명작의 고향」 연재가 끝나지 않았다면 이 시간 저는 아저씨께 편지를 쓰는 대신 이번 주 「명작의 고향」에 소개되었을 일백이십일권째의 책을 읽고 있겠지요. 제가 처음 「명작의 고향」을 읽은 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일회부터 읽지 못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소개한 오회 때 처음 아저씨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먼저 소개하신 것까지 단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명작의 고향」을 스크랩하고, 그 속에 나오는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일백이십회의 연재가 끝난 지금 아직 어리긴 하지만 대학 수능시험을 몇 달 앞둔 고등학교 삼학년 학생이 되었고요. 지난 이년 반 동안 매주 화요일마다 아저씨의 글을 읽고 그 글 속에 나오는 책을 사거나 구해 읽는 게 저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책들은 아저씨가 쓰신 「명작의 고향」 순서대로 제 방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습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만 보고도 저는 아저씨가 그 작품을 언제 소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꽃이 필 때라든지, 바람이 어떻게 불던 날, 혹은 서울 하늘에 첫눈이 내리던 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아저씨의 시간이 아니라 제 시간이겠지만, 어떤 땐 그런 제 시간을 아저씨께 알려드리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폭풍으로 가로수가 뽑히던 날 밤, 한 여자 아이가 아저씨가 쓴 「명작의 고향」을 따라 「마농레스코」를 읽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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