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23〉
현석에게 다시 전화가 온 것은 두 시간쯤 지난 뒤이다. 이번에 나는 열세번이나 벨이 울린 다음 송화기를 든다.
『나간다면서 벌써 들어왔어?』
『집으로 손님이 오기로 해서 기다리는 중이야』
『알았어. 나 지금 명동인데 또 전화할게』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조금 서운하다. 그러나 한 시간도 안 돼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나 신사동에 있어』
『이번엔 신사동? 아까부터 왜 그렇게 계속 장소를 밝히는 거야?』
『당신한테로 가고 있어.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는 끊어져버린다. 그리고 십분쯤 지나자 전화벨 대신 현관벨이 울린다. 현관문을 열자 싸늘한 바깥공기가 코로 스미면서 밤하늘을 뒤덮은 하얀 눈송이가 현석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현석의 어깨에도 눈이 수북이 앉아 있다.
현석은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꼭 끌어안는다. 차가운 뺨과 차가운 외투의 감촉이 상쾌하다.
『나갈 약속도 없고 올 손님도 없었지? 그리고 동생도 없고, 다 알고 있었어』
하면서 입을 맞추는데 입술도 차갑고 시원하다.
현석이 눈을 털고 들어와서 소파에 앉자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갖다준다.
『커튼 좀 열어봐. 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이렇게 꼭꼭 닫고 들어앉아 있어?』
현석의 말대로 거실의 커튼을 젖히자 유리문 가득히 함박눈이 날리고 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리는 눈만 바라본다.
『작년 겨울, 생각나?』
시선은 여전히 눈 내리는 밖을 향한 채 현석이 먼저 입을 연다.
『함께 영화 보고 나오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잖아. 근데 당신은 어떤 모임에 가야 했지. 나는 언짢은 마음에 괜히 그 모임에 대해 험담을 했고, 당신은 나한테 미안해져서 그 자리에 못 가겠다는 전화를 했고. 그러자 나는 또 그런 나 자신의 옹졸함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잖아. 당신이 붙잡아 주길 바랐는데 가만히 있더라구. 그땐 그렇게 당신이 닿을 듯 말 듯하는 데에 자주 기분이 상했던 것 같아. 혼자 눈을 맞으며 한참을 걸어갔는데 도저히 헤어지고 싶지가 않았어. 정신없이 뛰어 돌아와보니 당신은 가고 없었지』
<글:은 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