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38)

  • 입력 1996년 12월 9일 20시 24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12〉 대학원에 다닐 때도 그랬다. 내가 상현과 동거한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누군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입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려고 짓궂은 질문을 했고, 식당에서 만난 한 여학생은 마치 내가 아닌 상현이 소문의 피해자인 것처럼 나를 적대했다. 그때도 나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의심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반론이 준비돼 있는 법이었고 나는 남으로 하여금 내 말을 믿을 만큼 호감을 얻는 데에 전혀 자신이 없었다. 나는 투서로 인한 비난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내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데에서 정보사회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박지영이 말해주어서야 이 모든 것이 학교 게시판에 붙여진 출처 불명의 야릇한 대자보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투서의 내용이 주간지 기사처럼 흥미롭게 인용돼 있다는 것이었다. 시험이 시작된 이후 띄엄띄엄 학교에 나가던 나는 두번째 교수회의가 열린 다음날부터는 아예 집에 틀어박혔다. 애리는 집안을 어지럽히고 다시 그것을 치우느라 하루종일 부산했다. 나를 위한답시고 끊임없이 스파게티니 마파두부니 라면이니 하는 국제적인 요리를 만들고 하루에도 네댓 번씩 설거지를 부탁했다. 『교수는 정말 방학 때문에 할 맛 나겠다. 놀고 먹으니까 어때, 좋지?』 『이게 어디 놀고 먹는 거니? 안 먹어도 좋으니 가만 좀 내버려둬라. 그리고 뭐 교수들이 방학 때 노는 줄 알아? 앓는 거지. 앓고 나면 방학이 다 가 있어』 『그래? 그래서 언니도 요새 그렇게 얼굴이 안 좋은 거야?』 『아니. 그건 딴 문제야. 그럴 일이 좀 있어서 그래』 『뭔데?』 『잘 해결되면 알 필요 없는 거고, 잘 안되면 어차피 알게 될텐데 내 입으로 미리 말하고 싶진 않아』 『무슨 말이야, 그게?』 애리의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눈빛이 빛나기 시작한다. 『혹시 이선생님하고의 결혼문제?』 『…』 『선생님이 청혼했구나? 그럼 엄마한테도 빨리 알려야겠네?』 『애리야』 내가 정색을 하고 부르자 애리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다 받아낼 수 있다는 듯이 입을 야무지게 다물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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