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의 심리는 알쏭달쏭하다. 승리를 누구보다 갈망하지만, 막상 이기는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길 원하는 팬은 없다. 철새처럼 팀을 옮겨 다니는가 하면, 수십 년째 오직 한 팀만 바라보는 이도 있다. 당신은 어떤 팬인가?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이! 승! 엽! 홈런! 이! 승! 엽! 홈∼”
‘딱!’
“어, 어, 어? 와∼∼!!!”
경기장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한 ‘데시벨 측정 불가’의 함성이 터졌다. 축포가 터지고 하늘에선 파란 비(파란색 종이 릴 테이프)가 내렸다. 꿈인지 생신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듯 팬들은 관절이란 관절을 죄다 흔들어댔다. 이승엽이 유유히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베이스를 밟은 뒤에도 무아지경은 몇초간 더 이어졌다. 대구시민야구장을 메운 삼성 라이온즈 팬 1만여 명은 일제히 하나가 됐다. 그러곤 가족도 친지도 아닌 박석민을, 최형우를 목 놓아 불렀다. 거친 쇳소리를 내뿜으며…. 선수들은 공에 집중했고, 팬들은 그런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0년이 흘렀다. 야구장을 찾은 팬들은 출범 첫해인 1982년 143만 명에서 올해 715만 명으로 꼭 5배가 됐다. 사람들은 4월 개막전부터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가을 한국시리즈까지 경기장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나의 팀, 나의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돈과 시간, 그리고 열정을 바쳤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해 환호성을 지를 때도, 패배의 아픔에 절망할 때도 그들은 늘 그곳을 지켰다.
팬들은 왜 그토록 팀의 승리를 부르짖을까. 그들은 정말 하나 된 마음일까. 궁금하면 일단 들이대고 보는 ‘O₂’가 아니던가. 우선 SK 와이번스-롯데 자이언츠의 플레이오프 1차전(16일, 인천)과 삼성-SK의 한국시리즈 1차전(24일, 대구) 현장을 찾았다. 그에 더해 전화로도 다양한 팬들을 만났다. 우리의 질문은 이랬다.
“당신은 왜 팬이 됐나요?”
○ 팬은 승리만을 갈망한다?
거의 모든 팬은 자기 팀의 우세를 점친다. 2박 3일 휴가를 내고 대구에 원정응원을 온 김영철 씨(55)는 “SK가 4승 2패로 우승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플레이오프 때 롯데에 1승 2패로 몰릴 때도 떨어질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단다. 물론 인천에서 만났던 롯데 팬들은 당연히 “롯데가 이긴다”고 했었다. 롯데는 그 경기에서 졌다.
극성팬일수록 승리에 대한 확신은 더 크다. 미국 머리주립대의 대니얼 완 교수(심리학)는 ‘국제 스포츠심리학 저널’에 발표한 논문(1993년)에서 “특정 스포츠팀에 대한 일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 팀의 성적을 더 긍정적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승리를 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승리에서 얻어지는 명예심, 자존감 상승 등을 자신도 느끼고 싶어서다. 학계에서는 이를 ‘투영된 영광의 향유(Basking in reflected glory)’라고 한다. 로버트 치알디니 애리조나주립대 교수(심리학)는 “대학미식축구팀이 승리를 거둔 직후 사람들이 그 대학 로고가 새겨진 옷을 더 많이 입는다”는 연구결과(1976년)로 이런 심리를 입증했다. 축구팀이 졌을 때보단 이겼을 때 팀 홈페이지 방문자 수가 훨씬 늘어난다는 벨기에 연구팀의 조사결과(2002년)도 있었다. 이긴 팀과의 접촉을 통해 그 ‘영광(glory)’을 나누려는 의도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는 “2002년 월드컵 4강을 생각하면 한국 사람인 것이 더 자랑스럽게 여겨진다”며 “팀 성적이 좋을 때 그 팀이 연상되는 제품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승리가 고픈 팬들은 세계적인 팀만 골라 응원한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는 한국인은 많아도 셀타 비고 팬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박주영 선수가 그 팀에서 뛰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화학자들은 이를 본인의 유전적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캐나다 콩코디아대의 개드 사드 교수(진화심리학)는 “축구팀 관련 상품 매출과 성적 사이에 비례관계가 성립되는 이유는 ‘우리가 최고다. 그들은 패자다’라고 밝히고 싶게 만드는 진화적 메커니즘에 기인한다”고 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팬은 늘 불안하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겨서 나와 함께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혹시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심리적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스페인 발렌시아대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공동연구팀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을 전후해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결승에 오른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치열한 연장승부를 펼쳤다. 결국 연장후반 11분(종료 4분 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결승골로 스페인이 극적으로 우승컵을 가져갔다. 연구팀은 경기 당일 스페인 축구팬들의 테스토스테론과 코르티솔 분비량이 각각 29%, 52% 상승했다고 밝혔다. 테스토스테론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얻으려는 심리적 상황에서 많이 분비되고, 코르티솔은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즉 ‘혹시 오늘 지진 않을까’ ‘그래서 나의 사회적 지위도 함께 추락하진 않을까’란 불안감이 생리적 변화를 일으킨 셈이다. 연구팀은 ‘사회적 자아보호 이론’이란 것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했다.
○ 승리보다 안타까운 패배가 낫다?
초창기 국내 프로야구 팬들은 대부분 지역 연고팀을 응원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이 가장 많다. 어린이 팬클럽 시절을 잊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부모 손에 이끌려 야구장에 온 ‘모태 팬’도 다수다.
어린 시절 부산 사직구장 근처에 살았다는 김성훈 씨(30)는 혼자 플레이오프 1차전을 관람하러 왔다. 빛바랜 최동원의 유니폼을 입은 채. 그는 팬이 된 과정에 대해 그저 “자연스럽게”라고 했다. 정동우 씨(34)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군산상고 야구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아 타이거즈를 좋아하는 건 나에겐 본능”이란다. 왼쪽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경기 이천시에서 인천문학경기장까지 온 강대경 씨(32)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식이었다. “집이 인천인데요.” ▼ 20년간 우승 한번 못한 롯데 관중동원 1위 ▼
그런데 요즘 야구장에 가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롯데 팬,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의 LG 트윈스 팬,
롯데 식으로 “마!”를 외치는 두산 베어스 팬도 눈에 띈다. 혹시 승리하는 팀으로 팬들이 몰려서일까. 하지만 그건 1992년 이후
20년째 우승을 못한 롯데가 관중 동원 1위라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21세기 들어 벌써 4번 우승하고, 올해도 우승에
도전하고 있는 삼성은 올해 관중 수가 넥센 아래인 6위다.
강준호 서울대 교수(스포츠산업연구센터 소장)는 “예전에는
무조건 잘하는 팀, 우리 지역 팀을 좋아했다면 이제는 점차 팀이나 특정 선수의 스토리에 매력을 느끼는 팬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승승장구하는 팀보다 아슬아슬하게 진 팀이 팬들에게 오히려 더 큰
박수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건화 씨(33)는 올해부터 넥센 히어로즈 팬이 됐다. 박병호나 서건창처럼 시련을
이겨낸 선수들이 너무 각별해서다. “제가 높이뛰기 선수였다가 부상으로 그만둔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넥센 선수들을 보면 더
애틋해요. 짠하기도 하고.” 정은총 씨(26·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 들어서 두산이 좋다”고 말했다. 처음엔 이종욱
선수에게 꽂혀서 응원했지만 지금은 ‘지더라도 아깝게 지는’ 팀 컬러가 더 마음에 든단다.
현재 최고 인기구단인
롯데도 팬들의 외면을 받던 암흑기가 있었다. 져도 너무 졌으니까. 2002년과 2003년엔 경기당 평균 관중이 1910명,
2284명으로 8개 구단 중 각각 7등과 꼴찌를 했다. 롯데의 관중몰이는 2008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뒤에야 제대로
복원됐다. 윤성경(가명·33·여) 씨는 “원래 야구를 좋아했는데 로이스터 감독이 온 뒤 롯데 야구가 무척 재밌어졌다. 지더라도
시원시원한 야구를 한다”고 말했다.
○ 내가 팀이고, 팀이 곧 나다
윌리엄 서튼 미국 매사추세츠대 교수(스포츠학)는 팬의 정체성을 △사회적
팬(Social Fan·응원문화를 즐기는 팬) △집중적 팬(Focused Fan·열성적으로 응원하지만 실망하면 돌아서 버리는 팬)
△확립된 팬(Vested Fan·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팬)으로 구분했다. 이대형 선수에게 반해 LG 팬이 됐지만 포스트시즌엔
다시 롯데를 응원했던 윤성미 씨(26·여)나 SK를 응원하지만 고향팀인 삼성의 홈경기도 빼놓지 않는 김선경 씨(25·여)는 사회적
팬이다. 반면 외야석 끝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경기에만 집중하는 한화 팬 조현태 씨(30)는 확립된 팬이다. 그는
“장종훈 선수 덕분에 한화를 알게 됐고, 지금은 한화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라며 “가족 빼고는 제일 좋다. 첫사랑보다 더
좋다”고 했다.
조 씨처럼 자아 정체성을 팀과 동일시하는 팬들은 반대로 팀으로부터 상처를 입기도 쉽다. 박혜경
씨(29·여)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마산야구장 가까이에 살아 당연히 롯데 팬이 된 그는 화끈한 공격야구나 선수들의 뚝심까지도
‘딱 내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올 초 사직구장을 찾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응원가의 ‘최강 자이언츠’라는 부분이 ‘부산
자이언츠’라고 바뀐 것. “우리가 지들을 얼마나 챙겼는데, 창원에 NC 다이노스가 생긴다고 바로 경남을 버리려고 들다니. 정말
너무너무 화가 나서 미치겠더라고요.” 그는 당장 내년 3월 시범경기 때부터 생애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를 내려야 한다. 롯데
팬으로 남을지 아니면 NC 팬으로 새롭게 거듭날지를.
신재유 씨(34)의 고민은 조금 다르다. 삼성 골수팬인 그의
푸른색 유니폼엔 ‘이만수’가 새겨져 있다. 자신의 우상과 그 우상을 내친(그렇게 믿는) 구단 사이에서 적잖은 갈등을 겪어왔을
그다. “2007년에 만수 형님이 SK 코치로 대구 왔을 때 사인도 받았습니다. ‘언젠가 오셔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형님께서
‘때가 오겠죠’라고 했습니다. 전 그때만 기다립니다.”
미국 프로미식축구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구단주 아트 모델은
1995년 11월 볼티모어로의 연고지 이전 계획을 발표했다. 성난 클리블랜드 팬들은 수십 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중엔 “내
기억을 없애는 살인행위를 했다”며 구단주를 살인죄로 고소한 이도 있었다. 구단은 결국 ‘브라운스’라는 이름을 남겨둔 채 볼티모어
레이븐스가 됐고, 클리블랜드는 3년 후 브라운스를 재창단할 수 있었다. 현실 속 얘기는 아니지만 상처받은 팬의 극단적 행위를 그린
영화들도 있다. 토니 스콧 감독의 ‘더 팬’(1996년)과 롭 라이너가 연출한 ‘미저리’(1990년) 등이다.
스포츠구단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자아 정체성’은 주요한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팀의 성적이나 이벤트도 중요하지만 팬과
팀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장경로 성균관대 교수(스포츠마케팅)는 “스포츠팀과 함께 성장한 사람들은 팀 자체는
물론이고 그 팀과 함께한 기억이나 경험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된다”며 “결국 스포츠는 ‘팬들의 경험’을 마케팅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스포츠에서 자아를 발견한다
현대인은 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는 직장이나 가족 어느 곳에서도 확실한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강준호 교수는 최근 한 마케팅전문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인간의 ‘몰입’을 학문적으로 정의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스포츠는
인간이 가장 잘 몰입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하나”라며 “좋아하는 스포츠를 하거나 보면서 다른 생각과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단순해지는 것도 스포츠의 몰입성 때문이다”라고 썼다.
현대인은 외롭다. 그래서 스포츠팀을 찾는다. 우연한 기회에 그
팀에서 자아를 발견하면 누구보다 열성적인 팬이 된다. 반대로 자아와의 괴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돌아선다. 그러곤
자신과 닮은 팀을 찾아 떠난다. 팬들은 뒤돌아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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