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유지훤, 술먹고 몸싸움한 죄…“지면 끝장” 죽기살기 KS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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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7일 07시 00분


① 가을만 되면 펄펄 날았던 원조 ‘미스터 옥토버’였다. OB 출신 유지훤 덕수고 인스트럭터가 방망이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② 1990년 쌍방울∼1993년 OB∼2005년 한화 코치를 역임한 뒤 덕수고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유지훤 전 한화 수석코치(왼쪽)가 선수들의 수비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③ 30년이 흘렀지만 그는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82년부터 7년간 ‘OB맨’으로 살았던 선수시절 유지훤의 모습.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스포츠동아DB
① 가을만 되면 펄펄 날았던 원조 ‘미스터 옥토버’였다. OB 출신 유지훤 덕수고 인스트럭터가 방망이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② 1990년 쌍방울∼1993년 OB∼2005년 한화 코치를 역임한 뒤 덕수고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인 유지훤 전 한화 수석코치(왼쪽)가 선수들의 수비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③ 30년이 흘렀지만 그는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982년부터 7년간 ‘OB맨’으로 살았던 선수시절 유지훤의 모습.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 @bluemarine007·스포츠동아DB
감독 눈 피해다니며 한잔하던 주당
82년 KS 2차전 지고 동료들 술자리
일반인과 몸싸움까지…구단도 알아
그 멤버들 맹활약에 전화위복 우승

난 가을체질…없던 힘도 불끈 솟아
프로밥만 27년…아직 야구가 좋다

1982년 10월 12일 한국시리즈 6차전. 9회 삼성 배대웅의 타구가 OB 박철순의 머리 위로 넘어가자 잽싸게 공을 따라갔다. 1루수 신경식에게 멋진 러닝 스로로 시리즈를 끝냈다. 구단 깃발을 들고 동대문구장을 신나게 돌았다. 프로 7년간 통산 12홈런 187타점에 타율 0.225를 기록한 뒤 은퇴했다. 매년 5월과 9월에는 잘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을이면 펄펄 날았던 남자 유지훤(57)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오기로 야구했다. 부산서 혼자 올라와 야구로 자수성가했다. 지금도 야구 외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다.”

○대광고∼철도청∼공군∼상업은행을 거치다!

김재박이 대광고 1년 선배다. 1972년 김재박 이동한 김용달과 함께 제24회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했다. 1974년 철도청 선수가 됐다. 첫 월급은 4000원. 당시 철도청은 야구선수들을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으로 채용했다. “서울 하숙비도 안 됐다. 그때 방 한 칸짜리 하숙비가 한달에 6000원이었다. 은행팀이 2만원 받을 때였다.”

야구는 잘했다. 1976년 8월 1일 공군에 입대해 3년을 꼬박 채웠다. 제대 후 상업은행으로 이적하려고 했다. 철도청은 홍익회로 이름을 바꾼 뒤였다. 홍익회에서 거부했다. 유지훤은 버텼다. 결국 홍익회는 팀을 해체해버렸다. “나도 먹고 살아야 했다. 은행팀에 가니까 대우가 좋았다. 한달 월급이 2만7000원이었다. 보너스에 수당도 잘 나왔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다. 27세 때였다. ‘딱 5년만 뛰어보자’고 다짐했다. 계약금 1800만원, 연봉 1700만원이었다. 서울 잠원동에 17평 아파트를 1500만원에 샀다. 재테크는 아내가 도맡았다. 이사도 여러 번 했다. 처가살이도 두 번이나 했다. 결국 잠실에 아파트 한 채가 남았다. 프로야구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다.

○1982년 OB의 전경기 출전 유격수

프로야구 원년의 추억을 물었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10만원짜리 수표를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가지고 다닐 때”라고 했다. OB에는 돈이 넘쳤다. 그라운드에 돈이 굴러다녔다.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80경기를 치른 그해 OB 선수 가운데 유일하게 전경기를 뛰었다. “일주일에 4경기를 하니까 여유가 있었다. 선수들이 가족 같았다. 박용곤 구단주가 정말 잘해줬다. 술도, 고기도 엄청 사줬다. 모두 돈을 몰랐다. 메리트가 나오면 선배가 돈을 걷으라고 했다.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선수에게도 나눠주고, 같이 술을 마시러 다녔다. 그때 주당들은 배에 벤츠 2대씩은 들어갔을 것이다.”

기억나는 1982년의 경기는 한국시리즈. 사연도 있었다. 대전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연장 15회 3-3으로 비겼다. 대구에서 치러진 2차전에선 0-9로 완패했다. “그날 밤 이광환 코치와 이민우 부장, 김우열 윤동균 김유동 계형철 이홍범 유지훤, 이렇게 술을 먹으러 갔다. 수성관광호텔 앞이었다. 팀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뜻이었다. 거기서 사고가 났다. 우리와 안면이 있던 여자가 주위의 사람과 문제가 생겼다. 우리와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그 싸움을 구단에서 다 알았다. ‘팀은 졌고, 사고는 쳤고, 우리는 한국시리즈 끝나면 아웃이다. 앞으로 죽을 각오로 하자’는 분위기가 생겼다. 3차전 이후 그 선수들이 돌아가며 큰 활약을 했다.” 5차전에서 유지훤은 4-4로 팽팽하던 9회 1사 2루서 끝내기 좌전안타를 쳤다.

○1984년 OB와 삼성의 전쟁!

1984년 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가면서 OB와 삼성의 전쟁이 시작됐다. 양 팀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팬들도 가세했다. “지나고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치열했다. 우리 팀이라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이홍범은 삼성 오대석을 강하게 태클해 큰 문제가 됐다. “사실은 다른 선수를 겨냥했는데 사람을 잘 못 봤다. 애꿎은 오대석만 고생했다. 한번은 대구에서 경기를 이기고 나오는데 버스로 큰 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창을 뚫고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유리창이 깨졌다. 돌을 던지는 사람을 봤다. 버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배트를 들고 잡으러 갔다. 스파이크를 신은 채였는데 못 잡았다. 혈기왕성하던 때였으니까.” 선수와 팬들의 그런 열성이 모여 프로야구 30년의 역사를 만들었다.

초창기 OB의 주당들은 밤이 길었다. 감독의 야간순찰을 잘 피해 다녔다. “감독이 호텔 문 앞에서 지키고 있으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은 겁이 나서 들어가다가 걸리지만, 우리는 비상구를 통해 들어가거나 다음 날 훈련장으로 갔다. 감독이 방 검사를 나오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팀이 연패한다고 구단이 선수를 데리고 다니며 술 사줄 때였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때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

○5월과 9월에만 반짝하는 남자

1986년 가장 야구를 잘했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했다. ‘이제 몇 년 더 야구를 하겠냐. 정말 잘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항상 체력이 문제였다. 힘이 있는 5월까지는 타격랭킹 1∼2위였다. 그러다 타율을 까먹고 9월이 되면 다시 체력을 되찾아 성적을 내는 선수였다. 그가 기억하는 에피소드 하나. “1988년이다. 한대화와 타격랭킹 선두를 다툴 때였다. 선동열(이상 해태)이 마운드에 있는데 내가 장난을 쳤다. 한번 봐달라며 눈을 찡긋하면서 타석에 들어갔다. 선동열이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그때는 상대팀 포수에게도 가끔은 하나 봐달라고 농담할 때였다.”

그래도 가을야구는 잘했다. 1986년과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타율 0.406, 7타점을 기록했다. 가장 아쉬운 경기는 1987년 해태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사 3루서 김성한의 빗맞은 타구를 잡아 송구했으나 세이프가 돼 동점이 됐다. 결국 연장 10회 최일언의 폭투로 졌다. “지금도 아쉬운 경기다. 내가 덤터기를 뒤집어썼다. 9회초 우리가 추가점을 올릴 기회를 놓쳤다. 내가 3루를 돌아 홈까지 절반이나 갔는데, 3루 코치가 막았다. 주춤하다가 다시 들어가다 죽었다. 그때 (코치가) 돌렸으면 이겼다. 9회 최일언의 공은 포크볼이었는데 김성한의 배트 끝에 맞았다. 3루 쪽으로 치우쳤다. 나나 되니까 끝까지 따라갔다. 다른 선수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김성한이 그렇게 열심히 뛸 줄이야…. 우리가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면 분명 우승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승은 하늘이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선수 7년, 지도자 20년, 아직도 야구가 좋다!

1988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동대문구장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다음해 잠실구장의 OB 개막전에서 은퇴식을 했다. 이후 코치로 OB(두산) 쌍방울 한화를 두루 거쳤다. 1995년과 2001년 김인식 감독과 함께 우승을 경험했다. “OB 출신으로 3개의 우승반지를 낀 유일한 사람이다. 1982년은 멋도 모르고 우승해서 잘 모르겠는데, 1995년과 2001년은 여러 가지 사연들이 있어 더욱 기뻤다.”

30년 가까이 프로야구와 지내오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1982년이 그랬다. 지도자로서 느끼는 것은 선수에 대한 신뢰와 진정성이다. 야구는 다 똑같다. 자신이 선수에게 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 성공한다.” 야구가 지겨울 만도 하지만 그는 아직도 현장에 있는 것이 즐겁다. 지난해 11월부터 덕수고에서 인스트럭터로 어린 선수들과 함께하는 이유다.

유지훤은?

▲생년월일=1955년 10월 4일(우투우타)
▲출신교=대신초∼대동중∼대광고
▲프로 선수경력=1982∼1988년 OB
▲프로 통산성적=7시즌 627경기 1807타수 407안타(타율 0.225) 12홈런 187타점 173득점
▲프로 지도자경력=1990년 쌍방울 코치∼1993년 OB 코치∼2005년 한화 코치


전문기자 marco@dob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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