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차동철, SF볼의 마술사 “야구인생도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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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3일 07시 00분


1980∼90년대 해태와 LG에서 활약하며 SF볼(Split Fingered Fastball)을 구사해 화제가 됐던 차동철 건국대 야구부 감독이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자신만의 그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천|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1980∼90년대 해태와 LG에서 활약하며 SF볼(Split Fingered Fastball)을 구사해 화제가 됐던 차동철 건국대 야구부 감독이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자신만의 그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천|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해태·LG서 6회 우승 일군 명투수…건국대 감독

광주일고 2학년때 터진 5·18 민주화운동
계엄군, 총 들고 야구부 숙소 들이닥쳐
선동열 부친 “살려달라” 호소로 위기 탈출



해태 입단후 프로시절도 파란만장
청보 김신부와 전설의 15회 0-0 완투대결
삼성팬 해태버스 방화사건 경기때 마무리투수
변화무쌍 SF볼 구사로 부정투구 조사받기도

97년 은퇴후 모교 건국대 지휘봉

“단점을 장점으로 살리는 지도자 꿈꾼다”


1980년 5월 1일 대통령배고교야구 결승전. 최초로 광주의 야구명문 광주제일고와 광주상고가 만났다. 광주상고는 초고교급 선수라는 김태업, 이순철, 장채근이 버텼다. 광주일고는 선동열, 허세환, 이연수가 있었다. 결승전은 싱거웠다. 광주일고의 8-2 완승이었다. 2학년 차동철이 6회까지 광주상고 타선을 잠재웠다. 선동열은 7회 등판해 마무리를 했다. 그날은 광주일고의 개교 60주년이었다.

“전국체전 예선에서 2번 광주상고와 붙었다. 내가 이기고 선동열 형은 졌다. 조창수 감독이 이를 기억해서인지 나를 선발로 결정했다.”

차동철은 8강전에서 당시 고교최강이라는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와의 경기에 등판해 5-1 완투승을 거두며 우승으로 향하는 길을 닦았다. 차동철은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고교야구 시즌 첫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광주일고는 그러나 청룡기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광주상고도 그랬다. 이유가 있었다. 광주에서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바로 그날이었다.

○5월 그날 광주와 선동열 차동철 그리고 계엄군

그때 차동철은 대구에 있었다. 영호남 고교야구 친선경기에 출전했다. 뉴스를 듣고 선수들은 철수했다. 광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여수로 피신했다. 상황을 지켜본 뒤 학교로 돌아갔다. 교복을 입고 밖으로 다니면 무슨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선수들은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학교는 계엄군이 주둔해 있었다. 선수들은 비극의 시간에도 청룡기 대회를 준비했다. 투수들은 따로 훈련을 했다. 광주에서 떨어진 송정리 선동열의 집에서였다.

선동열의 부친 고(故) 선판규 씨와 조창수 감독이 선동열을 오토바이로 태워 이동시켰다. 배터리도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 사단이 났다. 포수가 계엄군을 향해 욕을 했다. 계엄군이 잡으러 왔다. 선수들의 숙소로 쓰던 한성여관으로 총을 들고 들이닥쳤다. 계엄군은 선동열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국보급 투수에게 총을 겨눴던 그 계엄군은 이 상황을 지금도 기억할 것이다. 선 씨가 계엄군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우리 아이들은 안 그랬다”며 제발 살려달라고 했다.

○차동철과 이종범의 남다른 인연

이순철과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다. 체구가 작았다. 전남고에 진학했다가 1학년 때 자퇴했다. 연합고사를 다시 보고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야구부에 들고 싶어 어머니와 학교를 찾았다. 조창수 감독은 차동철의 작은 체구가 탐탁치 않았지만 어머니의 큰 키를 보고 받아줬다. 피나는 배팅볼로 컨트롤을 가다듬었다. 겨울에 광주로 동계훈련을 오는 팀들과의 경기에 등판해 50이닝 이상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선동열 다음의 2인자가 됐다.

선판규 씨의 마음씀씀이는 대단했다. “동열이가 무리를 하지 않으려면 네가 잘 던져야 한다”며 보약을 챙겨줬다. 그는 건국대 최초의 호남출신 야구선수였다. 고(故) 한을룡 감독이 고(故) 김동엽 감독과의 인연으로 조창수 감독을 설득했다. 그 인연은 이종범에게도 이어졌다. 한 감독은 해태 시절 차동철에게 연락해 스카우트를 부탁했다. 차동철은 이종범의 부모를 만나 설득했다. “자네 같이 성공할 수 있다면 보내겠다”는 답이 왔다.

고교후배 이종범에게 야구용품 등을 잘 챙겨주며 높은 점수를 따고 있던 차동철의 설득에 프로행과 동국대 진학을 놓고 고민하던 이종범은 방향을 틀었다. “종범이 어머니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종범이 누나가 예뻤는데 사위로 삼을 생각도 있었다고 들었다. 하하하.”

1980년대 해태에서 뛰던 시절의 차동철. 스포츠동아DB
1980년대 해태에서 뛰던 시절의 차동철. 스포츠동아DB


○15회 0-0 무사사구 완투대결의 기억

86년 해태에 입단했다. 계약금 1800만원, 연봉 1200만원이었다. 처음 집을 샀다. 어머니는 차동철의 이름으로 하자고 했지만 차동철은 집안 형제 가운데 첫째가 잘 되어야 한다면서 큰형 이름으로 했다. 입단하자마자 10승 투수가 됐다. 컨트롤이 워낙 좋았다. 쉽게 던졌다. 삼판들도 좋아했다. “김정수가 4구를 내주면 김응룡 감독은 나를 불렀다. 선동열 형이 물러나면 마무리를 내가 하던 때였다.”

86년 차동철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남을 명 투수전을 기록했다. 7월 27일 인천구장에서 청보 김신부와 벌인 15회 0-0 완투대결이었다. “무사사구 경기였다. 야간경기였는데 두 투수가 워낙 빨리 던져 15회를 마쳐도 10시30분을 넘기지 않았다. 12회에 김응룡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괜찮겠냐고 물었다. 끝까지 하겠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뒤 김성한 선배가 기념이라며 그 공을 줬다. 김신부와 나중에 LG에서 만나 그 경기 얘기를 많이 했다.”

경기 뒤 숙소에서 강만식이 불렀다. 광주일고 출신 가운데 최선참인 그도 85년 삼성을 상대로 15회를 던지며 0-1 완투패를 당했다. 기상천외한 피로회복 방법을 알려줬다. “화투를 주며 열심히 치라고 했다. 팔의 피로를 풀어주는 데는 최고라고 했다. 당시에는 아이싱이란 말도 없었다. 피칭 뒤에는 뜨거운 물에 어깨를 담그던 시절이었다.”

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가 불타던 그 경기의 마지막 투수가 차동철이었다. 3차전 세이브에 이어 4차전 구원승도 올렸다. 86한국시리즈 우승파티가 열린 남서울 호텔. 김응룡 감독은 김정수와 차동철을 따로 불렀다. “진정한 10승 투수가 되려면 3년 연속 해야 한다. 우승을 했지만 오늘 맥주 3잔만 먹고 몸조리 하라”고 당부했다.

○SF볼과 차동철

차동철은 한국에 SF볼을 최초로 도입한 선수로 알려졌다. 원조는 따로 있었다. 장명부였다. “삼미가 건국대 훈련장에서 연습을 했다. 당시 장명부가 제자처럼 지도하던 선수가 신태중이었다. 훈련 때 이상한 공을 던졌다. 새로운 그립을 하며 ‘이 공은 타자들이 번트를 대도 내야플라이가 된다’고 했다. 열심히 보고 페퍼게임을 하면서 완전히 익혔다.”

처음 그 공을 받은 포수 장채근과 김무종은 “어떤 공이냐”고 물었다. 87년 한국시리즈 3차전. 차동철이 선발로 나섰다. 1회가 끝나자 주심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글러브와 벨트 등을 뒤졌다. 공의 궤적이 변화무쌍하자 불법투구로 의심했다. 무혐의. “장명부가 한국시리즈를 보다가 불법투구 의혹을 주위에 얘기했던 모양이다. 원조도 의심했던 공을 내가 던졌다.”

해태는 차동철의 호투를 발판삼아 3연승을 달렸다. “3차전까지 1승 1세이브였다. MVP가 될 수도 있었는데 김준환 선배가 4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시리즈를 끝내버렸다.” 이 마구를 광주일고 후배 문희수에게 알려줬다. 문희수도 SF볼로 새로운 투수가 됐다. 88년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해태의 2인자로 자리를 잡던 89시즌 도중 러닝을 하다 종아리 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 해태에서의 선수생활이 끝났다. 90년 LG로 트레이드됐다.

○LG에서 제2의 선수생활 그리고 모교로

유난히 서울 팀에 강했다. 해태에서 트레이드됐을 때 LG, OB, 삼성이 탐냈다. 삼성행을 원했지만 이순철의 한마디가 방향을 바꿨다. “사람이 크려면 서울로 가라.” LG 백인천 감독이 좋아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90년 OB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됐다. 2차전에 또 나가라고 했다. 거부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은퇴를 생각할 무렵 이광환 감독이 새로 왔다. 차동철에게 많은 배려를 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이 감독이 만든 스타시스템 덕분에 선수생활을 몇 년 더 했다. 좋은 강의도 많이 듣고 워크숍 노하우, 메모습관 등을 배웠다. 해태에서 이기는 야구를 배웠다면 LG에서는 지도자의 기본을 배웠다.” 97년 모교 건국대의 지도자가 됐다. 해태, LG 2팀에서 모두 6차례 우승을 경험했지만 아직 모교에 우승을 선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노력중이다. “어떤 선수도 그 폼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다. 함부로 뜯어고치지 말고 단점이라도 장점으로 살리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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