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이 만난 사람] 이영표, 낮엔 축구 밤엔 공부… “난, 두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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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3일 07시 00분


은퇴의 기로에서 미국프로축구리그(MLS)를 선택한 이영표가 전성기 못지않은 기량으로 지난 시즌 ‘꼴찌’ 밴쿠버의 돌풍을 이끌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은퇴의 기로에서 미국프로축구리그(MLS)를 선택한 이영표가 전성기 못지않은 기량으로 지난 시즌 ‘꼴찌’ 밴쿠버의 돌풍을 이끌고 있다. 스포츠동아DB
학업·축구 병행 위해 건너간 미국
서른 다섯에도 그라운드 종횡무진
시즌 1호골·팀 상위권 도약 견인

축구외엔 영어…행정가 꿈도 무럭


지난해 가을, 이영표(35·밴쿠버 화이트캡스FC)는 현역 은퇴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나이도 그렇고, 그동안 이룰 것은 다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든 유니폼을 벗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주위에서도 만류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공부’였다. 은퇴보다는 운동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이 바로 미국프로축구리그(MLS) 밴쿠버다. 정상을 원한 건 아니었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 뿐. 축구화 끈을 조여 매고 유니폼을 입자 힘이 났다. 말 그대로 베테랑의 관록이다. 개막전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4월29일 콜럼버스(미국)와의 원정경기에서는 MLS 데뷔골이자 결승골도 터뜨렸다. 사우디 알 힐랄에서 뛰던 2010년 4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이후 2년만의 골이다. 아직도 팔팔하다. 1일 국제전화를 통해 그와 인터뷰를 했다.

-리그 적응이 완벽한 것 같다. 데뷔골까지 넣었으니.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런데 기분은 좋다. 미국에 한국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분들이 응원을 많이 오셨고, 좋아하셨다.”

-경기외적으로도 보람을 느끼겠다.

“사실 처음 왔을 때는 이곳 축구가 인기 없는 줄 알았다. 편하게 축구할 생각이었다. 공부도 하고. 하지만 교민들의 관심이 대단하다. 타향에서 생활하다보면 조금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으실 것 같은 데, 그걸 달래기 위해 경기장에 오시는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내가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경기 끝나고 사인해주다보면 태극기 흔들면서 울고 그러더라. 애국심 같은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초반에 팀이 잘 나가는데.

“우리 팀은 작년에 리그 전체에서 꼴찌를 했다. 올해 초반은 잘 되고 있다. 원정 경기에서 처음으로 이긴 것도 기념할만하다. 꼴찌에서 상위권으로 올라왔으니 분위기는 좋을 수밖에 없다. 올해 목표는 플레이오프(PO)에 나가는 것이다.” (밴쿠버는 지난 시즌 MLS에 진출했다. 지난 시즌 성적은 꼴찌. 하지만 올 시즌 3일 현재 4승2무2패로 서부지구 3위고, 전체 19개 팀 중 5위다. 플레이오프는 각 지구 5위까지 진출한다.)

-관중 수준은 어떤가.

“상상 이상이다. 여기(밴쿠버)에는 경기당 평균 관중이 2만 명을 넘는다. 홈경기 때마다 매번 꽉 찬다.”

-그렇게 성공적인 운영을 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나.

“밴쿠버 구단은 마케팅을 잘 하는 것 같다. 프런트 직원만 70명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국내 팬들에게 MLS를 소개한다면.

“지난 10년 동안 엄청 빠르게 발전했다. 명문으로 꼽히는 시애틀은 평균 관중이 4만명을 넘는다. 미국 프로스포츠 중 평균 관중으로만 따지면 야구, 미식축구에 이어 3위다. 10년 안에는 인기도 면에서 3대 스포츠 안에 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역사는 짧아도 시스템이나 마케팅 등이 잘 갖춰져 있어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10년 후에는 전 세계적으로도 강한 리그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영표는 프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딜 가나 성공 스토리를 써왔다. 다양한 리그를 돌면서도 실패를 몰랐다. K리그(안양 LG, 현 FC서울)를 비롯해 네덜란드(에인트호벤) 잉글랜드(토트넘) 독일(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알 힐랄) 등 각 리그의 정상권 팀에서 부동의 주전으로 활약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10년 넘게 이영표를 취재한 기자 입장에서 보면 크게 3가지 정도를 성공 비결로 꼽을 수 있다. 뛰어난 기량과 자타가 인정하는 성실성이 첫 째다. 이는 왕성한 체력의 근원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인품이 두 번째다. 어딜 가나 동료들과 잘 어울린다. 종교적인 신앙심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기자의 개인적인 평가다. 이영표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어느 리그에 가도 잘 적응하는 선수라는 평가다.

“특별한 것은 없는데.(웃음) 굳이 말하자면 구단이 원하는 게 뭔지, 내가 해야 할 게 뭔지를 잘 안다는 거다. 팀이 왼쪽 포지션인 나에게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 말고 특별한 것은 없나.

“첫 해외 무대인 네덜란드에 갔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3개월 동안 동료들이 볼을 안주고 텃세만 부렸다. 하지만 잉글랜드 진출 이후부터는 쉬웠다. 모두들 나를 알아봤다. 그래서 적응이 쉬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유럽축구 중계를 통해 동료들이 이미 나를 알고 있더라. 그게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나이가 서른다섯이다. 힘들지는 않나.

“땅이 넓다보니 이동 거리가 많다. 시차 때문에도 힘들다. 1주일에 2경기를 하더라도 홈이면 괜찮은데, 홈과 원정을 오가면 힘들다. 젊은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별명 같은 것이 생겼나.

“우리 팀은 16개국 출신들이 모여 있다. 참 다양한 국적이다. 우리 팀에서 골키퍼 다음으로 내가 나이가 많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나를 보면 한국말로 ‘형’이라고 한다. 그게 호칭이다.”

-축구 이외에 하는 것은.

“영어 공부다. 해도 해도 힘들다. 영국에서는 생존을 위해 영어를 배웠다. 소위 서바이벌 영어였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려면 문법 등을 해야 한다. 정식으로 영어 공부를 해보니 힘들다.” (이영표는 조만간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문법이나 단어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주경야독의 어려움 속에서도 행정가라는 미래의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이영표는?

▲생년월일: 1977년 4월 23일 (강원도 홍천)
▲신체조건: 177cm, 66kg
▲학력: 안양중→안양공고→건국대
▲소속: 1999년 안양 LG입단→에인트호벤(네덜란드)→토트넘(잉글랜드)→도르트문트(독일)→알 힐랄(사우디)→밴쿠버(캐나다)
▲경력: 시드니 올림픽 대표∼2002, 2006, 2010년 월드컵대표

스포츠 2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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